<숨을 참던 나날>
남성이 여성에 비해 ‘문학’을 훨씬 덜 접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책을 아주 많이 읽는 다독가 중에도 소설이나 에세이는 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몇 달 전에는 모 자기계발 강사 – 이 사람은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기도 하지만 - 가 여자들은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세상 쓸데없는 책만 읽는다고 하여 소소하게 화제가 된 적도 있었고.
왜 남자들은 소설을 읽지 않을까? 이것은 늘 나의 의문점 중 하나였다. 물론 아예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봤자 대개 역사, 무협, SF, 웹소설 등의 특수한 장르(?)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즉 소위 말하는 순문학, 인간의 깊은 감정을 다루는 작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짧은 고민의 결과 나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많은) 남성들이 인간의 감정 자체를 깊이 파고드는 데 익숙하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 내가 남자가 아니라 이것이 생물학적인 특성인지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많은 남성들이 어릴 적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으며 자란 것이 한 가지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기쁨, 슬픔, 분노, 수치, 고독감 같은 내면의 감정들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데 익숙지 않고, 그런 감정을 억제하고 제어하게끔 교육을 받다 보니 자연스레 정서적인 부분과는 거리를 두도록 성장한 것이다. 나의 감정은 나만의 것. 너의 감정 역시 너만의 것. 각자의 감정은 스스로 해결하자.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그런 생각이 있다 보니 많은 남성들이 타인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상세하게 적힌 소설이나 에세이를 보면 단순히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을 넘어서 때로는 불쾌감에 가까운 느낌까지 받는 듯하다. 마치 공공장소를 알몸으로 활보하는 사람을 본 것 마냥. 이것은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어떤 ‘경향성’을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반면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소설이나 에세이를 아주 좋아하는데, 이는 내가 공감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거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여성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 ‘생물로서의 한 인간’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사고에 도달했고,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됐고, 어쩌다 지금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가에 대한. 수학으로 치면 문제 풀이과정을 지켜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들어 나는 인간이 기계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비슷한 기능을 지니지만, 성능은 모두 다르고, 그런 와중에도 환경에 따라 그 성능이 아주 좋아지거나 나빠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와 전혀 맞지 않거나 공감가지 않는 인물에 대한 에세이도 대부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보통 누군가의 행동을 두고 ‘공감’하기보다는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고, 소설이나 에세이는 이러한 ‘이해’를 도와준다. 좋아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에세이 <숨을 참던 나날> 역시 그런 측면에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저자는 테드에서 ‘부적응자로 사는 법’이란 강연으로 화제가 된 인물로, 현재 오리건 주에서 영문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저자의 이력이 아주 특이하다. 사실 특이하단 말을 붙이기 뭐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는 무관심을, 아버지에게서는 성적 학대를 당하며 성장한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하는 데 성공한다.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한 그녀 앞에는 찬란한 새 인생이 펼쳐진 듯 보이지만, 그런 기회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파티광이 되고 마약에 중독된다.
그 과정에서 결혼도 하고 임신도 하고 바람도 피우고 사산으로 아기를 잃는 경험을 하기도 하며, 이혼 이후 새로 만난 남편에게 거꾸로 버림을 받기도 한다. 알코올 문제도 심각하여 음주운전으로 임산부 한 명을 유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논문을 쓰는 동안 지도 교수와 잠을 자기도 하고, 교수가 된 이후에는 유부남이었던 제자와 바람이 나 임신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배가 부른 상태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출강을 다닌다.
언급한 에피소드만 보아도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의,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자유영혼’, 사실 자유영혼이라는 말로 퉁치기에는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는 수준의 비도덕자(음주운전 및 임산부 유산)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것만 봐도 누군가에게는 강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인물이지만, 신기하게도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사고 혹은 감정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리디아 유크나비치라는 ‘기계’의 성능이나 특징을 공부하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 기계에 대한 나의 호오와는 별개로 말이다.
<숨을 참던 나날>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책 전체에 물에 대한 이미지가 넘실거리는데, 이는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잘했던 것, 계속해서 사랑했던 것이 물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수영선수로 유년시절을 보냈고, 지역대회에서 우승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까지 진학할 정도로 재능을 지녔다. 물론 마약과 알코올 문제로 대학에서 퇴학당하면서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가지는 못하지만. ‘몸’에 엄청난 탐구심과 모험심을 지닌 것이 그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에피소드를 보면 무척 원색적이고 자극적이면서 동정을 하거나 가엾어할 듯한 내용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재미있고 경쾌한 느낌도 준다. 그런 이유는 첫째 그녀가 글을 아주 잘 쓰기 때문이고(문장이 시적이며 아름답다), 둘째 자기연민이 거의 없으며, 셋째 지나칠 만큼 솔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호불호가 굉장히 갈릴 듯한 책이기도 하다.
“분노란 우스운 것이다.
분노는 평생 사람의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가 완벽하고 아이러니한 순간에 밖으로 튀어 나간다. 내가 왜 문학 박사 학위를 땄는지 알고 싶은가? 오리건주립대학교 대학원의 소설 창작 워크숍에서, 작가 이창래가 내 글을 두고 “진부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인 척하고 창작 워크숍에 잠입했다. 키지를 만나고 난 후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창래가 내 글과 내 글의 정서가 진부하다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려줄까? 이런 생각을 했다. 너, 깜깜한 술집 뒷골목에서 한번 보자, 우쭐대는 면상을 제대로 갈겨줄테니까, 이 재수 없는 새끼야.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은, 생각한 것을 전부 종이에 쏟았다가는 결국....잡혀가게 될 거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