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에 빠져서 그의 작품을 줄줄이 보고 있다. 아주 오래전 극장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는데 그 감독이 이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 줄 미처 몰랐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훌륭한 작품들을.
그중에서도 누가 <부기 나이트>를 추천해주셔서 설거지하는 틈틈이 보았고, 드디어 다 봤다. 제목만 들었을 땐 몰랐는데 앞의 내용을 조금 보다 보니 아, 이거 그거잖아! 하며 기억이 나더라고. 중학생 때 비디오 가게에서 보고 깜짝 놀라서 기겁했던 바로 그 영화.
어릴 적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는 미성년자에게도 빨간딱지(에로비디오 말고 그냥 19금 영화)를 빌려주어 거기서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자주 빌려보곤 했었는데, 그때 우연히 발견하고 아주 놀랐던 그 영화였다. 충격적인 마지막 20분, 전신 노출 어쩌고 하면서 거의 포르노처럼 홍보하던.
당시에 에로 영화가 왜 일반 코너에 있는 거지?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두 번 다시 쳐다도 안 보고 지나갔었는데, 그 때문에 폴 토마스 앤더슨을 다시 만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이상한 감독이라 생각해서 굳이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당시에 홍보를 그런 식으로 했을까 하고 아쉬움이 남는 한편으로 당연하다 싶은 생각도 든다. 소재 자체가 포르노 배우들의 이야기인 데다가, 베드신과 노출의 수위가 높고, 야외 섹스 및 오픈 섹스(?), 섹스 공연(?) 등 지금 기준으로도 뭔가 파격적인 설정이 가득한 영화가 90년대에 ‘일반’ 영화처럼 다루어졌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특별한 꿈도 희망도 없던 17세의 주인공 에디에게는 유일한 장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성기가 유달리 크며 섹스를 잘한다는 것. 결국 에디는 나이트클럽에서 포르노 배우로 발탁되고 스타가 된 뒤 온갖 흥망성쇠를 겪게 된다. 뭐 대략 이런 내용으로 개인적으로는 <매그놀리아>보다도 더 좋았다. 물론 <매그놀리아>도 인생 영화로 꼽을 만큼 좋았으나 <부기 나이트> 속의 어떤 장면들이 나의 내면을 더 건드렸던 것 같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 때문에 자주 불행해진다. 욕망을 실현한 뒤 얻게 되는 기쁨은 그야말로 찰나일 뿐 곧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든, 명예든, 명성이든, 사랑이든, 무언가를 얻은 뒤에도 금세 다시 불행해지고 만다. 어쩌면 인간의 디폴트 값이 불행한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다소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돈과 명예를 더 많이 거머쥘수록 정신적으로는 더 불행해질 위험이 커지는 것도 같다. 더 많은 선택의 기회는 더 많은 행복을 줄 수도 있지만 더 많은 불행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
하여간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끝도 없이 새로운 것,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은 그야말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곤 한다. 돈과 명예와 인기와 사랑,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흔한 스토리다. 이 영화 뿐만 아니라 온갖 영화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플롯이기도 하고.
요즘들어 인간 혐오에 시달린다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인간의 저러한 특성을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인간은 생명체이며, 동물이며, 동물로서 하는 행동은 추할 수밖에 없으니까. 추한 것을 미워하는 것, 어리석은 것을 경멸하는 것, 나약한 것을 깔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쉬운 방법이다. 누구나 취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쉬운 방법을 두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토록 추한 인간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혐오하기가 더 쉬운 인간을 혐오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소재의 파격을 제외하고 플롯상으로 매우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건드린 이유 역시 결국 인간에 대한 애틋함을 가진 감독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 추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 온갖 멍청한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어리석은 인간. 그러나 그렇게 나약하고, 추하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감정을 소유한 인간, 그래서 가엾고 또 아름다운 인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매우 짧게 등장하는 조연에게도 어마어마한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영화 속 모든 인물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고, 모두가 애틋하게 여겨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내게는 ‘롤러걸’ 이란 예명의 포르노 배우 역할이 가장 와닿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포르노 세계에 데뷔한 뒤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롤러걸은 자신을 섹스심볼 취급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것을 불편해하기는커녕 대놓고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을 상품처럼 취급할수록 더욱 더 적극적으로 상품이 되려고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섹스돌.
그러던 그녀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랜덤으로 사람을 픽업하여 리무진에서 섹스하는 설정의 비디오를 찍다가 고교 시절의 동창을 만나고,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옛 이름을 부르자 정신적으로 붕괴한 뒤 그를 죽일 것처럼 폭행한다. 그 붕괴하는 순간의 표정과 연기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마치 유리로 된 웃는 얼굴의 가면이 깨지는 것 같았다.
17세의 소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성을 꼭꼭 숨기고 행복한 섹스돌로 살려고 했으나 결국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어딘가 꼭꼭 숨겨두었으나, 숨겨둔다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가면이 부서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연약하고 어리석고 추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성을 지닌다. 동물적 본능에 의존해서 하는 행동은 그저 동물로서 하는 행동일 뿐이지만,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행동은 ‘인간성’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 기억과 서사와 감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깨달음이 아주 늦게 올지언정 그 인간성은 결코 사라지지도 않고, 사라질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에게 참으로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