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Apr 13. 2020

부부의 세계와 드라마의 한계

세간의 화제인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방영된 부분까지 모두 보았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껏 내가 알아왔던 막장 드라마는 상대도 안 되는 느낌. 이 세상의 모든 조미료를 합하여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 느낌. 설탕시럽을 뿌린 치즈 불닭 까르보나라에 추가로 MSG를 팍팍 친 느낌. 아주 아주 재미있지만(흥미롭지만) 종합적으로는 굉장히 해로운 드라마라는 생각을 했다.

안 보는 사람들도 있기에 줄거리를 먼저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일과 가정, 사랑과 성공,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김희애.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종합병원의 부원장 자리까지 겸하고 있는 김희애는 잘생기고 다정한 영화감독 남편과 귀여운 아들과 함께 150평은 돼 보일 듯한 그림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인생은 완벽하다는 만족감을 누리며.

그러나 김희애의 완벽한 일상은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남편이 둘러준 목도리에서 여자 머리카락을 발견한 것이다. 김희애는 조심스레 뒷조사를 시작하고, 남편이 20살도 넘게 차이나는 딸 뻘의 어린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절망은 아직 이른 법. 더욱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믿었던 병원 동료는 남편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너를 의심하나 봐, 지금 너희 직장으로 달려가고 있어 등등)을 낱낱이 일러바치고 있었으며 가족처럼 지내던 옆집 부부는 남편과 그의 애인을 동반하여 커플 여행까지 다녀온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남편의 애인은 임신까지 했고.

여태껏 무능한 놈을 애지중지 먹이고 키우고 살림 다해주고 돈 벌어서 사업자금 대주면서도 한 번도 불만을 품은 적이 없었건만 날 이토록 기만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분노한 김희애는 이혼을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속인 이들 모두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렇게 김희애는 변호사를 찾아 재산분할과 양육권 소송을 대비하는 한편 이웃이자 남편의 친구인 재혁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상간녀의 집에 손님 행세를 하며 찾아가 그녀의 부모가 있는 앞에서 남편과의 불륜 관계를 까발리며 모든 것을 고발하기까지 한다. 결국 남편은 상간녀를 데리고 평생을 몸 바쳐온 고향땅을 떠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6화까지의 내용으로 6화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이다. 노빠꾸 직진. 6화 만에 권선징악이 다 이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드라마는 16부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6화가 끝나기 직전 새로운 실마리가 등장한다.

이혼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 김희애는 정체불명의 초대장 한통을 받는데, 그것은 바로 전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전남편은 불과 2년 만에 재기에 성공하여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것과 동시에 사업으로 돈도 많이 벌었는데, 그러면서 상간녀(현부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파티를 열겠다고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두둥!!

대체 이게 뭔 소리야 싶을 정도로 눈이 핑핑 돌아가는데, 사실 막장 드라마의 플롯이야 어느 정도 공식처럼 정해져 있으니 뭐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뿌리 깊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이다.

잘생기고 다정한 남편이라는 설정인데 남편이 잘생기고 다정하기는커녕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짜증 유발 인물이라는 점, 김희애가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점, 요리를 하는데 남자는 뜬금없이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거나 여자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다거나, 혹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정신과 의사처럼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거나, 돈도 능력도 없는 남편이 기생충 박사장 규모의 생일파티를 열 수 있다던가 하는 세부적인 오류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등장인물들의 시대착오적인 대사만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남편의 바람 사실을 알게 된 김희애가 이혼을 고민하자 동료는 말한다. “너 잘 생각해봐. 그런데 자기 입으로 자기가 먼저 이혼했다고 밝히는 경우 주변에서 봤는지. 다들 쉬쉬하고 살아. 너만 하더라도 남편 비서가 이혼했다고 하니 편견 가지고 봤잖아.” “결국 이혼하면 여자만 손해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희애는 마치 허를 찔린 마냥 움찔한다.

또한 남편의 성매매 사실을 알게 된 재벌 부인을 비롯해 등장하는 여성 대부분이 “남자들 섹스는 배설이잖아요.” 혹은 “남자들 그럴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떤 기사에서는 여성인물들의 이런 모습을 두고 가난하든 부자든, 직업이 있든 없든 여성은 모두 가부장제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물론 그 말도 맞지만 인물들이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2020년대에 사는 40대 여성들이 저런 말과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40대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우리 엄마나 그보다 더 윗세대 같은 말들을 하고 있다니. 등장인물 중 한 여성은 김희애 남편의 애인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나 위로 언니가 세 명이거든요. 그래서 뒤태만 보면 알아요. 애 가진 거.” 이거 내가 중학생 때 할머니 가정 선생님이 하던 그런 말인데... 아직 30대밖에 안 된 젊은 여자가 무슨 할머니 같은 말을 하고 있어.

한편 여성인물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성 인물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지. 바람피우는 남자와 그걸 들키는 남자.”
“그건 본능이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개소리의 향연인데, 혹자는 이를 두고 한국 남성의 썩은 클라스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남성들이 문제가 많은 것은 맞지만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많은 남성상 역시, 여성상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시대착오적이다. 요즘 남자들도 문제는 있으며 성차별적인 사고를 하지만 적어도 저거보다는 좀 더 교묘해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비록 속마음은 그럴지언정. 저런 멘트를 하는 남성들 역시 오늘날의 보편적인 30-40 남성이라기보다는, 50-70대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고방식에 가깝다.

등장인물이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드라마는 여러 가지 지점에서 문제를 가진다. 저런 개소리를 하는 남성들의 경우 누가 봐도 확연히 개새끼이기 때문에 자칫 ‘진짜 문제’를 가려버릴 확률이 있다. 좋은 사람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혐오적인 모습을 보이는 남성들의 진짜 문제점을 놓치게 할 우려가 있다.

여성들의 모습 역시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올드한 사고관 안에 가둬 두었다. 물론 중간중간 김희애의 입을 통해 “본능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야.” 등 각성한 여성을 보여주려 하고 있으나, 그 각성 자체가 이미 굉장히 올드하다. 돈도 능력도 있는 여성이 헌신하다 헌신짝 되어 버려지고 남편에게 보복한다는 90년대 수준의 주제와 플롯에서 조금도 진보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극 중 김희애의 “남의 가정 파탄 내는 건 나쁜년들이나 하는 짓이야!!” 대사는 실소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아마도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 위한 것이겠으나, 결국은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인 인물로는 동백꽃 필 무렵의 자영이를 들 수 있는데, 자영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려고 시도를 할 뻔) 자 상대 여성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너 가져. 저런 애 난 필요 없어.”

뭐 그 밖에도 등장인물들이 거의 초능력자 수준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아주 멀리서 차 안에서 나오는 음악을 캐치하는 소머즈의 귀를 가졌다거나,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선팅된 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꿰뚫어 보는 독수리의 눈을 가짐)이나, 남주의 취향이 한없이 구리다는 점(명색이 영화감독이라는 놈이 벽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스터 붙여놓고, 길거리에서 올드팝 틀어놓고 사랑고백함), 모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무슨 최면 건 것처럼 정보를 좔좔 털어놓는다든지, 매번 술 먹는 장면 직후에 운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든지, 고산 바닥 좁은 거 아시잖아요 하면서 마치 시골 중소도시 같은 설정을 해놓고 나오는 화면은 기본 8차선이라든지, 그 좁은 동네에서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뉴욕이나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행동하듯 한다든지, 3억 2천 들어있는 비자금 계좌를 엄청난 거금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든지(물론 큰돈이지만 극 중 김희애가 하고 다니는 것 보면 껌값으로 느껴질 만한 금액이다. 자기 남편 조사하라고 조사원에게 집도 얻어주고 차도 구해준다.) 등등 지적할만한 요소는 끝도 없이 많으나 차마 다 적을 수가 없어서 이 정도로 줄이기로 한다. 전남편의 새로 태어난 딸 이름이 제니이며, 두 돌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사진 상으로는 한 5-6살 되어 보인다는 것 또한 깨알 같은 웃음 포인트.

물론 이렇게 적었지만 사실 아주 즐겁게 봤다.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등장인물 모두가 자의식 과잉에 다 드라마틱하게 행동한다. 특히나 베드신 장면에서는 온갖 오글거리는 표정과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데 보다 보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무슨 지들이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 아 드라마 주인공 맞지. 실례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욕할 거면 대체 뭐하러 보냐, 그냥 안 보고 말지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해로운 것 아는데도 보는 내가 가장 문제이긴 하다. 다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야구 보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 하면 안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독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