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혜 작가의 <아무튼 스릴러>에는 “스릴러는 그 사회의 풍토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나 소설 등의 스릴러 작품에 각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취약 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공공의 안전이 취약한 사회라면 묻지 마 살인 같은 것이 소재가 될 확률이 높아지고, 아동에 대한 억압이 심한 곳에서는 어린이 귀신이 나타나는 식이랄까. 그런 차원에서 최근 몇 년 간 미국에서 유행하는 온갖 ‘스릴러’의 줄거리가 주로 부자지만 싸이코패스인 남편이 아내를 억압(폭력, 강간, 학대, 살인)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호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살펴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많은 호러 작품들이 국가에 따라 조금씩 양상을 달리 함을 알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권 국가의 공포 영화는 악마(사탄) 숭배나 사이비 종교 등이 주요 소재이고, 한국에서는 주로 원한을 가진 여성 귀신들이 등장하여 복수를 하는 내용이 많다. 놀랍게도 일본 귀신들은 대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차별적인 해코지를 하곤 하는데, 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이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지 혼자 추측을 해본 적이 있다. 이처럼 문화별로 두려움의 원형 같은 것이 다르게 나타나고, 그 근원을 파헤치다 보면 각 사회가 내포한 어떤 문제점 같은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르헨티나 소설가인 마리아나 엔리케스가 쓴 이 소설집에는 12개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모두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사회문제들을 은유적인 방식으로 고발한다. 빈곤, 성차별, 여성학대, 아동학대, 독재정권, 환경오염, 마약, 폭력, 총기문제 등등.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읽다 보면 몹시 오싹한 이야기들. 공포 그 이상의 공포랄까. 표제작이자 마지막에 실린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의처증이 심한 남편이 아내의 얼굴에 불을 지른 후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각자 자기 몸에 불을 지르는 이야기로, 읽다 보면 아르헨티나 역시 여성혐오와 온갖 성폭력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새로운 작가의 책은 약간 반신반의하며 읽는 편인데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신없이 빠져들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전반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음산하면서 오싹한 동시에 읽고 나면 묘한 상쾌함이 드는 이야기들이었는데, 모순된 표현이지만 읽고 나서의 느낌이 실제로 그랬다.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에서 작가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그런 장면 장면들에서 으으 하고 인상을 쓰다가도 결말에 이르면 뭔가 기묘한 후련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약간의 특이점이었고. 뭐랄까.... 어떤 상처가 매우 욱신거리는 상황에서, 아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상황에서 눈 딱 감고 확 상처를 헤집어버리면 아프면서도 속이 시원한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고 하면 조금 감이 올런지.
하여간, 읽다 보면 불을 지르고 싶어 지는, 불을 지르는 여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고픈 욕망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비슷하게 느낄 듯.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작품이 점점 더 많이 생산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모든 곳에서. 그리고 책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아마도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들의 우려대로, 남자들이 자기 연인이나 아내, 정부의 몸에 불을 지르는 사건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
“앞으로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남자들은 습관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처럼 되고 말 거예요. 목숨을 건진다면 말이죠. 그렇게 되면 꽤나 멋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시대의 아름다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p.330-331,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p.334,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어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지하철 여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밝은 면을 보도록 하세요. 그녀는 파충류처럼 생긴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성 인신매매만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요. 불에 타 괴물처럼 변한 여자에게 욕정을 느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언제 자기 몸에 불을 지를지 모르는 미친 아르헨티나 여자들을 좋아할 남자는요? 그런 여자들이라면 언제든지 손님한테도 불을 지를 수 있을 테니까요.” -p.340,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