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 책>을 읽고
2014년 말 도서정가제가 막 시작하기 직전에 온갖 책이 덤핑으로 쏟아져나왔다. 나 역시 왠지 모를 위기감에 아이 책을 포함하여 이런 저런 책을 성심성의껏 질렀고, 그로부터 며칠 뒤 무려 244권짜리 시공주니어 네버랜드 세계의 그림책이 도착했다.
5박스나 되는 책을 하나 하나 검수하면서 지치기도 하거니와 아이가 책을 잘 읽긴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인 것은 아닌가, 괜한 짓을 했나 하는 후회를 하려는 찰나, 눈이 크게 떠졌다. 펼쳐 늘어진 책 중에는 <모자 사세요>와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들어 있었다. 이 책들이 아직까지도 나오는구나. 어릴 때 읽었던 바로 그 책들. 엄마가 나에게 읽어주었던 책을 다시 아이에게 읽어주는 기분이란.
좋아하던 옛 책을 다시 읽는 기쁨을 누려본 나는, 그 뒤부터 어린 시절의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동화책부터 온갖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절판되어 구할 수 없거나,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너무도 좋아하던 지경사 소녀소설 시리즈가 권당 25000~30000원 선에 거래된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놀랐다. 읽고 또 읽어 내용을 거의 외워버렸던 계몽사 디즈니 명작동화는 가격도 가격이거니와(60만원) 중고나라에 올라오자마자 판매되어버리는 희귀 매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파트 장터에서 5천원에 20여권을 구했을 때는 어찌나 기뻤던지.
이처럼 ‘그 때 그 책’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곽아람의 <어릴 적 그 책>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책을 한 권 한 권 다시 찾아 모은 모험기이자, 유년시절을 더듬는 추억의 지도이다. 연령대가 겹쳐서 그런지 좋아하고 즐겨읽던 책들이 비슷해서 덩달아 추억에 푹 빠졌다. 책 한권 한권도 기억에 남지만, 책 자체의 내용보다도 그 책을 읽던 당시의 내 모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동네 끝자락에 있던 헌책방에서 새로 들어온 소녀소설이 있나 살피던 나의 모습, 용돈이 부족해 책 살 돈이 없자 서점 구석에서 주인 눈에 들키지 않도록 몰래 책을 읽던 기억, 모두가 잠든 밤 자그마한 스탠드를 켜고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엄마가 사준 <세계의 전래동화> 전집을 통해 푸에르토리코니 타히티니 하는 낯선 지명을 익혔던 것, 온갖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늘 어린 시절 그다지 행복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처럼 추억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하느라 바쁘셨고, 친구도 많지 않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고. 하지만 어릴 적 좋아하던 책들을 다시 만나니, 그 책들을 읽었을 때의 기쁨을 떠올리니, 같은 시간이 다른 색깔로 다가왔다.
기억은 결국 희미해지고 빛이 바래서 힘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고. 그러나 돌이켜보면, 추억은 항상 마음 속, 머리 속 깊은 곳에 자리해서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고 있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종종 자문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직장 생활은 안정됐고, 돈도 제법 모였다. 꽤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 사회에서는 나를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골드미스’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자주 스스로를 껍데기처럼 느꼈다. 퇴근 후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나는 끝없이 내 안으로 침잠했다. 서러운 일들에 무뎌졌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내 바닥에는 뭐가 있을까? 기자인 나 말고, 30대 커리어 우먼인 나 말고, 그런 포장지들 말고, 가장 밑바닥에서 굳은 심지처럼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뭘까? 그래서 몰두했다. 추억의 책 모으기에.”
“그런데 이 책을 왜 나한테 사줬어? 그리고 그 전집은?”
“엄마가 다 어릴 때 읽은 책이거든. 그러니까 너희들한테도 읽히고 싶었지.”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30대 중반의 나는 떠나보낸 줄로만 알았던 유년과 다시 손을 맞잡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다시 읽기는 내게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 지금까지의 삶을 점검하는 행위다. 유년은 쉽게 죽지 않는다. 인간은 인생의 어떤 고비에서 다시 ‘한 살배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