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요즘은 블로그를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하지만(대개 인스타로 옮겼을 듯), 5년 전쯤만 해도 럭셔리 블로거라는 것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하나같이 전문직이라든가 아무튼 잘나가는(=부유한) 남편을 둔 미모의 전업주부들로, 럭셔리한 일상을 과시하며 유명세와 인기를 얻었다. 유명해진 뒤에는 한결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연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당시에는 저렇게 여유로워보이는 사람들이 왜 굳이 장사를 하겠다고 나설까 싶었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퇴사한 뒤 5년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난 지금은.
그들은 인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주부로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된 뒤, 머지않아 남편이나 아이 이외의 존재로부터 인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을 것이고, 부유한 일상을 전시하여 사람들의 열망과 선망과 질시를 얻었을테고, 그로 인한 우월감이나 만족감을 느꼈을테고, 곧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질투나 욕망이나 인기 같은 일차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보다 구체적인 욕구. 내가 정말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만족감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정말 힘드시겠어요” “엄마가 얼마나 힘든데요!” “정말 대단한 일 하시는 거예요!”라고 자주 이야기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이 어린이집 간 시간에 브런치 카페에 모여 있는 아줌마들을 보면 때리고 싶다든지,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 쓰는 된장녀 같은 것들 꼴도 보기 싫다든지, 나도 로또 당첨되면 ‘주부’나 하고 싶다든지. 맥락과 상황이 거세된 멸시와 혐오의 문장들.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것보다는 출근하는 게 낫다는 말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활동은 결국 인정받지 못한다.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사회가 그러하니까. 그러므로 그녀들이 얼마나 부유하건, 혹은 얼마나 ‘주부’로서 노력을 하건, 불가항력으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건 중요하지 않다. 집에 있으면 그 자체로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럭셔리 블로거들에 대한 호불호나 옹호와는 무관하게 왜 돈도 많은 그녀들이 한결같이 쇼핑몰 사장으로 이어졌었는가에 대한 작은 단상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럭셔리 외벌이 가정이라든가, 성희롱이나 성차별을 비롯하여 육아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수없는 고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결국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에는 정부에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만든, 입주금이 아주 저렴한 대신 기간 내에 아이를 3명 이상 낳아야만 하는 임대주택에 입주한 네 가족이 등장한다. 아이를 셋 이상 ‘생산’해야만 하므로, 부부 둘 중 한 명의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가점을 주어, 입주민 대부분이 그러한 상황이다. 일반 아파트와 다르게 네 가족만이 사는 주택이므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돌봄노동, 가사노동, 육아, 계급, 차별, 비정규직, 가부장제, 성폭력, 오지랖, 그리고 폭력.
책 속에는 럭셔리 블로거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저런 크리피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금액 때문에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밖에 없었을만큼 네 가족이 저마다의 고충과 십자가를 지니고 있다. 그러함에도 책을 덮고 나서 문득 오래전의 그녀들이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여성의 이슈는 늘 비슷한 자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개선된 점이라곤 단 하나, 그림 값을 제때 못 받아 동동거리고 핫식스니 레드불로 일용할 양식을 삼으며 밤을 버티는 와중에 그래도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잖니 너는 자유롭잖아 같은 푸념을 친구들한테서 더는 듣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암전이었고, 기혼 유자녀 친구들은 출산 축하 인사와 아기 내복 선물에 이제 너도 우리와 같다는 승리감과 고소함을 담아 건넸으며, 그러고 나선 피차 육아에 치여 소식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효내는 그전에 친구들이 하던 행동 - 마주 앉은 무관계한 상대방이 바로 이 환난의 원인을 제공하기라도 한 양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스스로의 불운한 선택과 그 결과를 전시하는 일 -을 다른 독신 및 딩크족 동료들에게 자신이 그대로 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뒤,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다림이밖에 없다는 초조감과 자괴감을 중화하기 위해 의뢰가 들어오는 일들의 대부분을 거절 않고 악착같이 받아 매달렸으며, 화장실에서 이삼 분가량 휴식을 가질 때면 자유네 마네 같은 말을 들으며 남 속도 모르는 질시와 부러움을 받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요진은 고의든 실수든 자신의 얼굴에 닿았음이 분명한 신재강의 손가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터였다. 세상 모든 남자의 손가락은 그것이 어디에 닿았든 간에 잠시 앉아 앞발을 비볐다가 떠난 파리에 불과하며, 파리채를 제때 휘두르지 못한 것은 자신이라고 애써 믿으면서.”
“언제나 선을 넘어올 듯 말 듯한 자리에서 신재강의 말과 행동은 종료되었다. 물론 선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 요진이 어느 순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싸늘하게 자르거나 거절해도 그만이었다.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서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피곤한 여자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이웃으로 간주되기 싫었다. 좋은 게 좋은 줄 알며, 사소한 농담에 호응해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는 게 바람직했다.”
“정말이지 교원은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이즈음 환멸을 느꼈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품을 들였던 매순간의 노동과 의무가 10원어치의 의미도 없다고 선고받기란 자주 있는 일이었으며, 일상에서 여산의 일가친척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교원은 스스로마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절박감에 살림과 육아를 더욱 밀도 있게 사수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는 누구나 부러워하며 좋아요 버튼을 클릭하는 각종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남았었다.
(......)
어떤 말들이건 타임라인을 넘어서면 사라지는 찬사들에 불과했으나 어차피 무보수 노동일 바에야 기록으로 남기고 남들의 눈길 한 번이라도 더 받는 게 교원에게는 일종의 감정적 보상으로 다가오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