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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Sep 21. 2018

하용가를 아시나요

“하이, 용돈 만남 가능?”

정미경의 <하용가>를 읽었다. 얼핏 처용가를 연상시키는 이 제목은 ‘하이, 용돈 만남 가능?’의 줄임말이다. 각종 만남 사이트에서 성매매를 하려고 눈알이 벌개진 남자들을 두고 ‘하용가 부른다’며 조롱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지금은 폐쇄된 소라넷을 둘러싼 이야기 <하용가>에는 여성들이 당해온, 당하고 있는, 아마 앞으로도 당하게 될 온갖 성범죄가 등장한다. 추행, 폭행, 스토킹, 몰카, 강간, 그리고 ‘리벤지 포르노’란 이름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폭력.

소재가 소재인만큼 집중해서 금세 읽을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문학적 측면에서는 기대보다 다소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의 성범죄 버젼이랄까. 중간 중간 설명하거나 가르치려는 대목이 많고, 캐릭터들은 다소 평면적이며, 무엇보다 인물들간의 대화가 작위적인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리고 이 소설의 가치는, 이 소설이 결코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다.

최음제를 먹고 정신을 잃은 채로 모텔에 끌려가 강간을 당하거나, 샤워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보니 창 밖에서 모르는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거나,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남친이 술김을 핑계로 강간을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몰카로 인해 고통받다가 자살한 여성의 영상이 ‘유작’이라는 이름 아래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나 남성들 입장에서는 ‘모든 남자가 다 이렇지 않아, 어디서 이런 저질스런 놈들과 비교를’이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이 분명히 알아야할 점은 소라넷을 하지 않고, 몰카를 찍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후방주의’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의 사진이 돌아다닌다. 맥심 같은 잡지의 야한 화보일 때도 있지만 연예인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린 사진일 때도 있고, 심지어는 일반인 여성인 경우도 있다. 외모가 뛰어난 일반인 여성은 좋은 타겟이 되어 무수히 공유된다. 회사 다니던 시절에 한 남성 동료는 “승혜씨만 보세요~ 원래 남자들끼리만 공유하는데 승혜씨랑은 친하니까” 하며 각종 기업별 미모로 유명한 일반인 여성의 사진과 프로필이 적힌 메일을 보내온 적이 있다. 내가 속해있던 단톡방에서 누군가 일반인 몰카 영상을 공유한 적도 있다. 이런 소소하고 무의식적인, 누군가를 해칠 의도 없이 그저 재미로 한 모든 행동이 소라넷을 유지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소라넷은 폐쇄되었어도 수많은 대체재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또 유지되는 이유이다.

여성들 입장에서 역시 달가운 소설은 아닐 것이다.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여성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지를 시시각각 깨우쳐주니까. 현존하는 공포를 다시금 느껴서 유쾌한 사람은 없으니까. 당장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건물 화장실에 휴지가 너무 많아서 살펴보니 몰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페이스북에서 수백회 공유되기도 하였다. 범인은 같은 건물 19층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성이었다고.

오래전 첫째를 임신했을 때 입덧을 꽤 심하게 했었다. 하루는 퇴근 후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강남역까지 걸어오는 길에 도저히 못참겠어서 가로수 밑에 구토를 하고 말았다. 수치심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대충 수습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술 많이 드셨나봐요? 집이 어디세요? 저희가 데려다 드릴게요. 그들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괜찮다고 하고 돌아섰지만 집으로 오는내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술취한 줄 알았나보네. 근데 아직 7시밖에 안됐는데. 보통 길에서 술 취해서 구토하는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이 흔한가? 모르는 사람이? 그것보다 대체 왜 웃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기분나쁘게.

그로부터 몇 년 뒤 ‘그것이 알고싶다’가 소라넷의 실체를 다루었다. 오래전 그날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며 소름이 쫙 끼쳤다. 그 때는 아직 ‘소라넷’이라는 사이트며 ‘골뱅이(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여성)’라는 단어며, 술에 취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내 안의 어딘가가 그들의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챘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선량한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그 때 맨정신이 아니라 실제로 술에 많이 취한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 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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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수는 문득, 저들은 저렇게 골뱅이가 되어도 안전한 귀가를 염려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장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어도 자기 몸을 단속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껴본 적 없을 이들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누리는 ‘별일 없음’의 축복을 알기나 할까.”

“소라넷이 네이버나 다음처럼 다양한 관심사를 다루는 포털이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표방한 곳이니만큼, 100만 명의 이용자는 허수가 아닌 실수일 가능성이 높다. 100만 명이 얼마나 많은 수인지는, 수도권에서 1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수원과 용인 정도라는 것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 100만 명이라는 숫자는, 그 개개인을 ‘변태’나 ‘괴물’ 등으로 호명하기에는 ‘보통’이 되어버릴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수였고, 보통이기 때문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 이 모든 분석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소라넷 유저들은 대한민국 ‘보통’의 남자들인 것이다!”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일부분이고 대다수는 그 일부분이 생산하는 콘텐츠를 즐기는 정도이지만, 문화라는 건 그렇게 만들어진다. 소라넷의 불법 촬영물을 소비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업로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라넷에 올라온 여친 능욕 사진에 모욕 댓글을 달고 남초 커뮤니티에 퍼나르는 이용자들이야말로 문화의 향유자이자 전파자이며 공모자들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이 규정에 따라 많은 이들이 처벌을 피해가고 있었다. 여성의 몸을 몰래 촬영한다고 해도 가슴이나 엉덩이를 부각해 찍은 사진이 아닐 경우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았다. 화장실에서 여성의 무릎 아래 다리를 찍은 것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지하철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여성을 촬영한 것은 ‘일반적인 눈높이’에서 촬영한 것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거리에서 치마를 입은 여자의 전체 뒷모습 사진을 촬영해 유포한 이 또한 무죄였다. 그 이미지는 ‘모르는 여자들 따라가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모르는 남자가 따라오면서 사진을 찍는 그 상황에서 여자가 느꼈음직한 공포와 불쾌함이 범죄의 기준이 아니었다. 또한 채팅을 통해 전달받은 이미지를 유포시킨 경우, 촬영이 아니라는 점에서 처벌을 피했다. 가장 중요한 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성폭력 범죄가 되기 때문에, 특정인의 얼굴을 식별하기 힘들다거나 ‘평균적인 여성’을 몰래 촬영한 이미지들은 기소조차 되기 힘들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한 남자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그들은 염려했다.”

“중국 국적의 조선인 남성이 서울 도심에서 3일간 31차례 여성의 다리를 집중적으로 촬영했다가 고소당했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피해자의 모습에 호감을 느껴 자신의 반려자도 유사한 모습이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그 사진을 간직하고자 피해자의 전체적인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라며 일부 무죄 판결을 내렸다.”

“남성들은 몰래 찍고 올리고 댓글을 달고 여기저기 퍼날라도 크게 벌을 받지 않았다. 남자라면 당연히 호감을 느낄 만해서 여자의 몸을 촬영했고, 그것은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하지 않으므로 죄도 뭐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살았다. 다만 피해자 여성들은 동영상이 언제 어디에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여전히 떨고, 2차, 3차 유포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에서 홀로 고통스러워했다.”

“물론 기화영이 그 모든 일을 잊을 수 있게 된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건 잊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미 자신의 삶 일부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이 슬픔과 무기력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 그 기억을 품고서도 미래를 꿈꾸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럴 수 있는 힘이 기화영 자신 안에 있음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생존자로서 기화영의 존재가 일깨워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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