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었다. 저자인 김원영씨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계신 분으로 지체장애 1급의 장애인이다. 저자의 이력도 있고,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역경 극복기, 혹은 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예상과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보통 이런 류의 책이라면 주로 개인적인 경험담이나 주변 사례를 위주로 풀어나가는 에세이 형식이 많을 것이나 이 책은 철학 서적에 더 가깝다. 장애는 과연 누군가의 정체성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품격과 존엄은 무엇인가, 등등, 거대담론을 주로 다룬다. 철학적인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써 그 고민과 사고의 깊이가 상당하여 따라가기가 버거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왜 이렇게 어렵게 풀었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굳이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나 싶은 순간도. 그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앞서 그 정체성이라는 것의 개념을 공들여 설명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신체 장애이든 정신 장애이든 그것이 극복해야 될 대상, 감추고 숨겨야 할 ‘단점’으로 인식되면서 정체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말로 하면 장애인들이 불편 없이 지내는게 어떤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얼마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영화 상영관 기사의 댓글이 떠올라 순간 암담해지기도 했다. (베스트 댓글의 내용은 “왜 그런것까지 우리가 배려해줘야 하냐” 뭐 이런 내용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친절’과 ‘배려’에 기대야만 생활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 사회의 온갖 소수자, 즉 ‘실격당한 자들’을 대하는데에 있어서의 자기 점검도 하게 되었다고나. 소수자를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과연 스스로의 만족감과 어떤 전시욕구를 위해서인지, 혹은 정말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위해서인지 등등. 물론 개인적으로는 설사 전시욕구일망정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내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간혹 소수자, 혹은 소수자스러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 상처를 입었다는 경험담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소수자로서의 특성을 아예 무시당하거나, 혹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 정체성 자체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기에 생기는 일이다.
오래 전 유럽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실 여행의 경험이란 것이 대부분은 사람에 의해 생겨난다고 해도 좋을텐데, 그 때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사소한 언행에 기분이 매우 좋아지기도, 한순간에 잡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멀리서 나를 보고 알 수 없는 말로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고, 대놓고 모멸감이 드는 욕설을 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적과 성별을 떠나 동등한 친구로 대우해준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다.
또한 동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드러내놓고 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동양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보이는 경우에는 그것이 욕설을 하거나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사람들에 반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그것은 상대가 나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동양인’ ‘여성’이라는 특징으로 단편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소수자를 대하는데 있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동양인 여성’이었던 나의 경험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 상대의 소수자성에 집중하지도, 그것을 무시하지도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 저자의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는 이야기를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 신체적 장애나 질병 등을 이유로 시회에서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품격 있는 삶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59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p.71
정체성의 수용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와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살아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이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p.153-154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p.199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포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p.231
나는 닉 부이치치와 이지선 씨가 실제로 위대한 도전을 이뤄낸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들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삶을 이런 의미에서만 ‘미적으로’ 이해하는 접근은 장애인의 신체가 가진 다른 실존적 의미와 사회적 맥락을 차단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p.261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p.261-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