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고
올 봄 나온 이기호의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를 읽고 작가에게 그만 홀딱 반해버렸다. 빼어난 유머감각, 놀라운 리얼리티,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인간의 다면성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 한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주구장창 그 작가만을 찾아 읽는 습관이 있는데, 올 한해는 10여권에 달하는 이기호의 이전 작품들을 한꺼번에 읽었다. 어쩌다보니 최신작부터 오래된 것 순으로.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세월감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봤다. 개중 몇몇 이야기에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고.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이기호의 첫 소설집으로, 마지막까지 안 읽고 남겨두었던 책이다. 성령충만기라니...제목부터 벌써 재미있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재미있고 명석한 작가의 초창기 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도 있었고. 그만큼 큰 기대를 안고 있었던 책이었으나 정작 펼친 후에는 끝까지 마치는 것이 버거웠을 정도로 읽는 내내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읽다가 몇 번이나 덮을 뻔 했으나, 오로지 전작을 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그리고 이 불쾌한 감정과 느낌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집념으로 읽었다.
8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 여성들은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적인 도구, 혹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도구, 그도 아니면 남성을 각성시키는 객체로서의 도구.
작가의 등단작이자 가장 처음 실려있는 ‘버니’라는 작품은 보도방을 운영하다 어떤 지체장애 여성을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닫고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양아치의 이야기이다.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지체장애 여성은 오로지 랩으로만 대화가 가능하다. 그녀는 윤간을 당하고 동료들에게 얻어맞고 성판매를 위해 온갖 곳에 돌려지는 와중에도 늘 즐겁게 랩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양아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 아파한다.
또 다른 단편인 ‘머리칼’은 살아있는 머리칼을 가진 어떤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스님이 식모살이를 시킬 아이를 구하러 고아원에 갔다가 머리칼이 탐스러운 한 아이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데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아이의 머리카락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어느날은 스님을 발기시킬 정도로 발칙한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낌 스님은 그 머리칼에 무쇠핀을 채우게 된다. 그러다 산골에 놀라온 한 남자가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남자는 처음에는 무쇠핀을 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껴 싸구려 핀을 사와서 갈아끼워주려 하다가 그만 핀에서 풀려나 살아 움직이는 머리카락에 매혹당하고, 결국 그녀를 옥탑방에 가두어놓고 매일같이 성적으로 착취한다. 나중에는 점점 이상해지는 스스로를 보며 위기의식을 느껴 그녀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이 주된 서사이다.
다른 이야기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전쟁통에 검은 소에게 강간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소를 닮은 아들을 출산하는 여성이라든지, 교회에 온 삶을 바치며 신실한 신앙심을 키우다가 노출 성추행범(바바리맨)을 전도하는 걸 일생의 과업으로 삼고 마침내 그걸 해내고, 끝내는 그를 남편으로까지 삼은 여성의 이야기라든지.
정말 한결같이 불쾌감을 넘어서 어떤 징그러운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빻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소설집이 출판된 연도를 보니 2004년이다. 문학만큼 시대를 잘 반영하는 예술작품도 없다. 이기호 작가가 유난히 젠더 감수성이 빻았던 ‘한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그 시대가 그랬던 것이다. 그냥 그 시대가 여성을 그렇게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려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문학이란 것이, 남성작가들이란 것이, 그것도 30대 초반의 남성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란 것이, ‘선녀와 나무꾼’스러운 서사에서 전혀 발전도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강간당하고, 착취당하고, 도구로서 이용당하고, 혹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거룩한 존재로만 묘사되는 여성, 누구도 그것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시기.
생각해보니 2004년이면 내가 더 이상 한국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던 무렵으로,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왜 한국소설을, 특히나 남성작가의 소설을 그렇게 오랫동안 기피해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이며 여성주의며 이런 것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꼈었나보다. 이 소설집을 읽고나서, 그동안 한국소설이 왜 재미가 없었는지, 그리고 최근에 왜 다시 재미있어졌는지가 좀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결국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한 뛰어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에 대한 차이점도 비교적 명확히 보인다. 작가들은 남들보다 더 잘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작가는 그만큼 더 잘 느낄 것이고, 훌륭한 작가는 시대의 분위기를 예민하게 느끼고 그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사람이다. 이기호 작가의 최근작에서는 위와 같은 초창기의 ‘빻은’ 감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시대에 잘 적응해왔다는 뜻일 것이다. 매우 영리하고 능력있는 작가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물론 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다. 요즘 시대에 단풍보고 이년 저년 화냥년 하는 사람이라든가, 여친한테 차였다고 집에 와서 아내 붙들고 엉엉 우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시대를 못 쫓아가고 아직도 감수성이 90년대 2000년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세상은 냉담하고 독자는 냉정하므로 그 결과는 뭐, 도태되는 것밖에 더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