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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16. 2018

1950년대, 미국에는 워마드가 있었다!

<폭스파이어>를 읽고

1950년대 뉴욕주의 가난한 동네에 사는 소녀들은 어느날 리더인 렉스를 주축으로 자경단을 결성한다. 이름하여 폭스파이어. 한결같이 불우하고 열악한 가정 출신인 폭스파이어 자매들은 문자 그대로 피의 결연을 맺고 - 집에서 문신을 하며 그 피를 서로 섞는다 ㄷㄷㄷ -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다. 성추행 교사의 차에는 “여학생들을 따먹는 선생”이라는 문구를 적어 망신을 주어 쫓아내고, 조카를 성폭행하려는 삼촌을 다같이 달려들어 실컷 패주기도 한다. 여동생에게 강제로 성매매를 시키는 남자의 집에는 불을 지르기도 하고, 친구를 성희롱하는 남성의 목에는 칼을 가져다대며 위협하여 쫓아낸다.

초반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은 책을 읽을수록 더욱 명확해지는데...남성에 대한 분노로 모였으나 그 저항의 방법이 불법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것, 여성과 계급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인종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흑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이며 실제로 폭스파이어 가입을 희망하는 소녀들 중 흑인은 거부한다 ), 성평등 추구를 넘어 남성을 상당히 적대시하고 증오한다는 것(남성과 사귀면 처단당한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구성원 간의 관계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 등등....이...이거 완전 워마드 잖아?

19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1993년에 쓰여진(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출간) 조이스 캐롤 오츠의 <폭스파이어> 속 자경단 ‘폭스파이어’는 많은 면에서 워마드를 연상시킨다. 단 실제의 워마드가 아닌 세상이 ‘생각하는’ 워마드를. 최초에는 원대한 포부와 정의감에서 시작한 일이 불법과 폭력, 사기 - 물론 소설은 인물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만 - 로 끝난다는 것도 그렇고 절반 정도의 정의감과 절반 정도의 중2병이 섞여 있는 등장인물들도 그렇고.

이야기는 젠더, 계급, 인종 문제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데, 특히나 폭스파이어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 혹시 ‘남성’ 배후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남친이 누구인지 빨리 털어놓으라며 추궁당하는 부분은 여성 혼자서는 흉악 범죄조차 저지를 수 없다는 당시의 편견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녀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오츠는 인물들을 애정으로 대하면서도 그들의 모순되고 사악한 면모까지 여과없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떠나 매우 매우 재미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은 답답했고, 소녀들이 복수하는 대목은 짜릿했으며, 주요인물 중 하나인 렉스가 감옥에 간 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했다. 인물들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그 중에서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인 렉스는 몹시 매력적이었다. 시점과 장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문장은 그녀가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도 나와있는데 이동진 평론가와 김혜리 평론가로부터 4.5점씩을 받은 상당한 수작으로 알고 있다. 어제 궁금해서 잠시 보다가 소설만큼 재미있지 않아서 중간에 껐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가 있을 때는 무조건 영화를 먼저 보아야 할 듯. 하여간 영화도 꽤 평이 좋은 듯 하니 소설을 읽기 귀찮은 사람들은 영화를 대신 봐도 좋을 듯 하다. 매우 추천이다. 불행하지만 용감한 소녀들이 꿈꾸었던 작은 혁명이 실패한 이야기.


영화 <폭스파이어>






우리는 사람들이 범죄라 일컫는 일들을 저질렀다. 그 짓들 대부분은 처벌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의 희생자는 모두 남자들이었고, 그들은 너무 수치스럽거나 너무 겁먹은 나머지 당당히 밖으로 나와 불평하질 못했으니까. -p.14

그녀는 지난 몇 달 간 일어났던 몇몇 사건들, 그러니까 우리 또는 우리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 지역의 소녀와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무척이나 흥분했다. 그 시기는 소녀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시기였지만 우리는 당시에 그에 대해 말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해먼드 출신의 열아홉 살 간호학과 학생이 강간당한 후 교살당하여 시신이 도시 밖에 있는 배수로에 버려졌는데, 그 짓을 저지른 남자는, 어쩌면 한 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그 남자들은, 결코 잡히지 않았다. 또 다른 예로는 샌더스키에 사는 젊은 임산부가 침입자로 추측되는 사람에 의해 집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또한 살해당했는데, 알고 보니 그 ‘침입자’는 그녀의 남편으로 밝혀졌다! -p.145

그녀는 흥분해 있었고, 단어는 굴러떨어지듯 튀어나왔으며, 두 눈의 홍채는 팽창되어서, 우리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런 일들은 특수한 경우라고. 이 미치광이와 살인자들도 특수한 경우라고. 그러면 렉스는 벌컥 화를 내며 말을 끊었다. “아니, 전부 다야. 남자들 전부가 다 그렇다고. 이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인 거야. 그들은 우릴 증오해. 남자들은 우리 나이가 몇이건 우리가 대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싹 다 미워하고 있다고. 근데 아무도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아. 심지어 우리조차도.” -p.145-146

그녀가 하도 길길이 뛰는 바람에 설득할 방법이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말했듯(그리고 이는 바로 지금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진실이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고, 당신이 어린 소녀이거나 여자라면 당신은 여성이며, 당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46

내 생각에 우리는 일종의 믿음의 단계에 접어든 것 같았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 알 수 없이 모든 게 얽혀 있는 꿈속에 있는 것처럼.
아마 당신도 그 타인들 중 한 명이리라.....소심하고 점잖은 체하며 독선적인 사람.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비행 청소년 - 여자 깡패 - 못된 계집애들. 안 그런가? -p.182

매디, 난 배우고 있어. 하루하루 힘을 얻고 있어. 누구도 다시는 내 목 뒤를 밟지 못할 거야. 누구도 다시는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거야. -p.243

나중에 렉스는 여자로 살게 되면 자기가 아무리 다른 남자들이 하는 것만큼 일을 많이 해도, 혹은 더 해도, 돈은 덜 받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었다. -p.272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한 때, 늙은 테리오 신부가, 사제직을 박탈당한 알코올중독 부랑자가, 다리가 짧아서 발이 땅에 닿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의 얘기를 듣고파 초조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렉스 새도프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던 걸 생각하고 있다. 개개인은 결코 불의를 개선할 수 없다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지구는 고통을 겪은 사람뿐만 아니라 침묵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곱게 갈린 뼈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좀체 견디질 못하지만 그들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한다고. 그러다 렉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요. -p.280

렉스는 왜 트럭에서 울고 있었던 걸까? 나는 몇몇 사내들이 아주 저속하게 굴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녀 생각에 같이 다닐 수 있겠다고 봤던 사내들이 진짜로 야비한 수준까지 그녀를 괴롭혀댔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는 상황이 대부분 좋았다. 직원들은 렉스 새도프스키를 존중했다. 그녀를 거의 자기네 패거리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라고 특혜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일도 정말 열심히 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그러다 차츰 두세 명 정도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른 직원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농담을 던지고, 심지어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기까지 했는데, 렉스가 경멸적으로 묘사한 바에 따르면 똥같이 추근거렸다.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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