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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20. 2018

찌질해서 사랑스러워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책도 많이 읽는 반면, 꽤나 허접한 책도 많이 읽는 편이다. 소위 말하는 칙스릴러도 자주 읽고, 이상한 에세이도 많이 읽는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도 이미....뭔지는 콕 집어서 말은 안하겠지만. 하여간에 읽고싶은 책 리스트가 점점 더 길어지면서, 평생이 가도 이 책들을 다 읽을 날이 오진 않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한가지 결심을 했었다. 앞으로는 시간 때우기용 가볍고 술술 넘어가는 책은 그냥 읽지 말자고. 그럴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고 중요한 것들에 쓰자고. 그러나 결심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지켜지는 것이던가.

<잘돼가? 무엇이든>은 영화감독 이경미의 에세이 겸 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영화감독의 에세이라, 얼핏 생각해도 뭔가 예상이 갈만한 그런 내용이다. 게다가 감독이 연출한 두 작품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썩 재밌게 보진 않았던 기억에 - 나쁜 영화는 아니지만 취향을 탈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큰 흥미가 느껴지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살짝 펼쳐서 한 번 본다는게 그만..... 아니 근데 이런 부분을 보고 어떻게 그만 읽냐고..

“ ‘실은.... 가끔 심심할 때 헤어진 남자 친구 홈페이지에 들어가요. 그러다가 헤어진 남자 친구의 현재 여자 친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죠. 그런 짓을 하다 보면 헤어진 남자 친구의 전전 여자 친구의 홈페이지를 들어가는 일도 생기는데, 그러다 보면 헤어진 남자 친구의 전전 여자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남자 친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 헤어진 남자 친구의 전전 여자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남자 친구의 절친 여자애가 내 동생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인 경우도 있더라구요.’ 뭐, 이런 이야기.....” (p.31-32, 길티 플레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 호기심을 후회할 필요없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물론 말했다시피 뭔가 큰 의미를 주거나 깨달음을 남기는 것는 아니다. 그러나 책이 반드시 무슨 의미를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재밌기만 한 거, 그게 어디냔 말이다.

작품을 두개나 봤음에도 이름은 꽤나 생소한 느낌이었던 이경미 감독은 알고보니 엄청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영화감독임에도 세상에서 시나리오 쓰는게 제일 싫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영화를 본 뒤 “저 감독은 남자에게 평생 사랑 받아본 경험이 없을 것 같아요.”라고 혹평을 하는 이를 두고 “남들 다 눈치챈 걸 자기 혼자 알아챈 것처럼 특별한 척 하기는, 못생긴게!” 라고 뒤끝이 작렬하는 사람.

이토록 자신의 내밀한 찌질함을 가감없이 까발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살면서 감탄했던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부분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면서 유머러스한 사람들이란 공통점이 보인다. 나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매우 찌질하고. 사실 욕망이나 의지를 가진 이상 찌질하지 않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딱히 인간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가 얼마나 찌질한가를 보면 신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찌질함은 일단 디폴트값으로 둔 채로, 나는 스스로의 찌질함을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누군가에 대한 중요한 판단 기준 중 하나로 삼는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찌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는 평균 이상으로 찌질할 뿐더러 재미도 없다. 그럼에도 눈치는 더럽게 없고 곁에 있으면 거슬리기만 한다. ㅋㅋ

그런 면에서 <잘돼가? 무엇이든>은 수준급으로 찌질한, 그러면서 스스로의 찌질함을 인식하고 있는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었다. 재밌게 읽고 인터넷 서점 서평을 확인해보는데 완전 노잼(유머랍시고 뭔가를 떠드는데 핵노잼이다)이라는 평도 꽤 있었다. 역시 취향이라는 것은 유머에 대한 일종의 감각과도 통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의견이 다른 것보다 개그코드가 다른게 더 참기 힘들다는 생각을 문득. 안 웃기는데 자꾸 웃기려고 들면 괴롭다.


아, 나는 정말이지 시나리오 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다. 문득 괜한 상상을 해본다. 실연당하는 게 끔찍할까, 시나리오 쓰는 게 더 끔찍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쉬워진다. -p.46, 사고의 전환

그러다 보니 내 모든 행동과 생각이 대한 자가 검증은 더욱 집요해진다. ‘지금 이 생각이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건가, 아니면 설득력이 있나?’ 머릿속으로 따진다. ‘사실은 이게 자격지심에서 나온 건데 그럼 쪽팔리니까 지금 이건 자격지심이 아니라고 내가 납득할 만한 변명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는 중이면 내가 진짜 자존심 상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생각한다. ‘아.....정말이지 변비는 너무 불편하다.......’ -p.53, 행복이 가득한 집

언젠가 동종 업계 친구들과 깊은 밤까지 술을 마시다 우울증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서 가장 사회성이 떨어지고 성격적인 결함도 숨기지 못해 곧잘 자신도 불편하고 남도 불편하게 만드는 나에 비하면 정말 상식적이고 매우 사회적이고 참으로 무난한 그들이 모두 우울증 약을 복용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혹시 내가 여태 그걸 안 먹고 살아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p.58, 내 귓가의 노랫소리

나는 우울증이 진짜 무섭다. 재미를 주고 돈과 명예를 가져간 어느 뮤지션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나도 ‘돈, 명예 그리고 재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일 나라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포기할까? 일단, 돈도 안 되는데 재미도 없으면 우울하다. 명예는 없는데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재미있는 걸 찾아본다. 재미없는데 명예만 있으면 우울하다. 재미있는데 돈이 안 되면 우울하다. 돈도 안 되는데 명예가 있으면, 이렇게 명예가 있는데 돈은 안 된다니 더 우울하다. 일단 나는 누군가에게 재미를 주기는커녕 내가 우울하지 않은 상태로 두 가지를 획득하는 것 자체부터가 불가능이네... -p.62-63, 내 귓가의 노랫소리

지하철 안.
내 오른쪽에 앉은 태국 여성과 왼쪽에 앉은 흑인 남성 둘이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통성명하고 취향과 생일을 묻는다. 금세 친해지더니 페이스북 친구가 된다. 태국 여성은 김태희처럼 생겼고 형은 밥 말리같이 생겼다. 그 사이에서 난 오징어다. -p.80, 2014.03.19

시나리오를 쓰면서 경계하는 점.
나를 무고하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습관.
어려운 장애물을 대충 피하고 싶은 습관.
인물을 통해 남 탓하고 싶은 습관.  -p.250, 201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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