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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25. 2018

태어나서 복수하리라

<넛셸>을 읽고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가 어렵다고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모두 보급형 문고본으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수업에서 만난 실제의 셰익스피어는 생각해왔던 것과 완전히, 완전히 달랐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고어부터, 요상한 문법, 게다가 원어민이라 하더라도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못알아듣게 하는 배배 꼰 문장들. 아니 왜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살과 피(flesh and blood)’라고 부르냐고요.

게다가 수업에서 다루던 작품이 하필이면 또 햄릿이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햄릿을 제일 싫어했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이해도 안 가고 무엇보다 햄릿이 너무 싫었다. 우유부단하고 찌질하고 그 와중에 끝도 없이 빈정대서 짜증을 유발하질 않나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미친(척 하는)놈.... 하여간에 그래서 공부를 거의 하질 않았고 시험은 폭망했고 결과는 참혹했지만 어쨌든 다 지나간 이야기.

이언 매큐언의 <넛셸>은 햄릿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 태아가 주인공으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죽이려는 엄마와 삼촌의 공모를 지켜본다. 태아가 주인공이라는 설정부터 일단 호기심이 들었는데, 보지는 못하지만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모체의 감정과 신체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태아의 특성을 매우 영리하게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극적이고, 시적인 문어체 대신 현대의 영어로 서술되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셰익스피어의 특유의 표현들이 군데 군데서 발견되는,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다.

한 때 셰익스피어의 업적을 폄하(?)하는 말 중에, 어차피 그도 순수창작한 것은 거의 없고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설이나 민담을 다 짜깁기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인간의 기쁨과 슬픔, 모순, 이기심, 사악함, 그 와중에 한 켠에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존재하는 어떤 양심까지 잘 그려낸 사람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짜깁기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과장 조금 보태어 삶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비극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들어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작품은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기도 하다. 아버지를 배반한 어머니, 그 사실을 아는 아들, 이라는 소재만으로도 <넛셸>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듯이.

막상 필요했던 시기에는 왜 셰익스피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고 이해도 안 갔고 가장 중요하게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햄릿이 유난히 오래도록 사랑받고 회자되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한편 누군가 이언 매큐언을 두고 ‘소설의 신’이라고 했던 말도 이 작품을 읽고나니 수긍을 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위키피디아도 잘 되어 있지 않아 몰랐는데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겨 셰익스피어에 대해 찾아보다가 거의 덕후 수준으로 몰두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료의 방대함에 사뭇 놀랐다. 그 중에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신조어를 정리한 목록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Swag 같은 거. 하여간에 예전에는 싫어했지만 지금은 싫어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스웩~~!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 참을성 있게 두 팔을 엇갈려 모으고서, 기다리고 기다리며, 이 안에 있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 있는지 궁금해한다. -p.9

나는 이 안에서 떨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일은 끝이 없을 것이다. 나쁜 끝이 축복처럼 여겨질 때까지. 아무것도 잊히지 않고 아무것도 씻겨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p.103

나는 내 임무를 상기한다. 부모가 별거중인 아이는 그들을 재결합시키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상상한다. 지옥. 시인의 단어로, 파멸해 나락으로 떨어짐을 의미한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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