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기, 둘째날
본래 나가사키는 갈 계획이 없었다. 몇박할 시간은 없는데 당일치기는 수박 겉핥기 하듯 쓱 보고 오는 것 밖에 안되고, 일단 이번 여행 테마는 힐링이었으므로.....일단은 그랬다, 일단은. 책도 무려 4권이나 들고 왔다니까. 오기 전에는 틈틈이 다 읽고 갈 줄 알았는데....
하여간 그랬는데 어딘지는 까먹었지만 이런 글을 보고 만 것이다. 후쿠오카까지 가서 나가사키를 안 보고 오는 것은 너무 어리석다였는지, 아깝다였는지. 결국 조금 고민하다가 아침 일찍 출발해서 다녀오기로 했다.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까지는 2시간이 걸린다.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서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도착해 있었다. 후쿠오카도 인구밀도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가사키는 더더욱 없다. 인구가 많지 않은데 이 정도 규모의 인프라가 있다는게 새삼 놀랍다. 나가사키에 왔으니 이제 나가사키 짬뽕을 먹으러 가야지.
나가사키는 일반적인 항구도시들과 다르게 특유의 냄새도 없고 매우 깨끗하다. 뭐, 일본은 어딜 가도 깨끗하긴 하지만. 청소를 자주하는 것인지 하다 못해 담배꽁초나 껌 등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도 상당히 깨끗해서 물 속에 고기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는데, 아무리 낚시를 못하는 사람(<- 나)이라도 낚을 수 있을만큼 물고기가 많았다. 한국 같았으면 이거 낚는다고 낚시꾼들이 엄청 많았을텐데.
처음 먹어본 나가사키 짬뽕은 맛있었다. 일본 음식점들은 따로 밑반찬을 주지 않는 대신 세트 메뉴가 많은데, 짬뽕 + 교자 세트가 700엔밖에 하지 않았다. 일본에 처음 놀러갔을 때는(도쿄), 한국보다 1.5~2배 가량 비싼 물가에 그나마 저렴한 것 위주로 손떨며 먹었었는데. 요즘 들어선 먹거리는 거의 비슷하거나 일본 쪽이 더 저렴한 거 같다.
식사를 마친 뒤엔 데지마를 비롯하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가끔씩 재미로 하는 심리 테스트에서 “당신은 여행할 때 관광과 휴식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합니까?” 라는 질문을 보면 휴식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을 포함하여 어딜 가기만 하면 늘 미친듯이 돌아다녔던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 스스로를 모른다. 그러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한참을 걸어서 오우라 천주당과 글로벌 정원으로. 둘 다 높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길 양 옆으로는 기념품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 역시 카스테라 가게가 많다. 비파 아이스크림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여기서 밖에 못 먹어요!!!”란 문구와 함께 붙어 있었는데 또 그 말에 낚여버린 나란 새럼... 비파 아이스크림은 망고랑 비슷하면서도 그 뒤에 상큼함이 가미되어 아주 맛있었다.
일본어로는 구라바엔이라고 부르는 글로벌 정원은 개항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이 살았던 집이다. 입구에서부터 BGM으로 네덜란드스러운(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것과는 거리가 먼 요상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마치 스코틀랜드 평원에서 켈트족이 죽은 동료의 시체를 안아 들고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나올 법한 그런 음악이다. 당장이라도 사자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퍼런칠을 한 멜 깁슨이 튀어나올 것 같다.
늦가을 같았던 날씨는 어느덧 갑자기 겨울로 바뀌었다. 언덕이라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나뭇잎들이 스치면서 귀신 나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아직 꽃들은 알록달록하게 피어 있다. 여기 저기 둘러보는데 옛날 사람들은 참 힘들게 살았구나 싶다. 산책로가 너무 길어서 집에 한 번 들어가면 밖에 못 나올 것 같다. 게다가 집이 엄청 큰데 난방시설이 오직 벽난로 뿐이다. 겨울에 얼마나 추웠을까. 과학기술 만세.
여기저기 있는 분수에는 동전이 던져져 있었다. 트레비 분수도 아니고 신사가 있는 곳의 연못도 아니고 네덜란드 귀신들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을런지.... 내려오는 길에는 어느덧 스코틀랜드 장송곡 풍의 BGM이 독일 펍에서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프릴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한 팔에 맥주잔을 들고 멜빵 바지를 입은 남성과 팔짱을 끼고 흥겹게 민속춤을 출 때 나올 법한 음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열심히 다니다보니 기력이 딸려서 이만 돌아갈까 싶었으나 그래도 세계 ‘신’ 3대 야경이라는 나가사키의 전망을 봐야 하지 않나 아쉬움이 남아 전망대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3대 야경도 아니고 ‘신’ 3대 야경은 뭔지. 본래의 나가사키 전망대로 유명한 곳은 꽤 떨어져 있기도 하고 케이블 카를 따로 예약해야 한다기에 패스하고 근처의 산 꼭대기에 있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구글에 보니 길이 매우 가팔라 등산수준인데다가 어둡고 사람이 안다니는 길이라 엄청 무섭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그걸 보니 더욱 마음이 동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힙스터 한 명쯤은 품고 사는 것 아닙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구글이 자꾸 이상한 곳으로 안내한다. 공동묘지 옆길로. 아직 해가 떠있고, 뭐 안 무서운 거 아는데 그래도 묘지가 몇십미터나 이어지는 것은 좀... 그랬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더 심각한 길로 안내한다. 좁은 계단 주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여길 다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은. 착신아리2에서 귀신에게 쫓겨 산꼭대기의 신사로 도망가는 아주 무서운 장면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길이 꼭 이렇게 생겼다.
힘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허억 허억 하고 내가 내는 소리가 내 귀에 너무 세차게 들려서 녹음했다가 영화에서 추격전 할 때 효과음으로 써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열심히 올라간 계단이 중간에 끊겨있다. 구글은 분명 여기로 올라가라고 하는데....여길.....올라가라고??? 위쪽에 보이는 구멍같은 것이 사람들 다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산을 타기 시작했다.
타자마자 얼마 안되어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강력한 느낌이 왔다. 그런데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힘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나는 정대만이다....나는 유노윤호다....나는 한승혜다.....는 개뿔, 이러다가 진짜 조난 당할 것 같다. 결국 계단이 끊긴 지점까지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다가도 하마터면 실족사할 뻔 했다. 온몸은 숲에서 한참 구르던 사람처럼 나뭇잎으로 뒤덮였다. 옷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번식의 기회를 놓칠세라 이름 모를 자잘한 씨앗들이 여기 저기 깊숙이 박혀있었다.
계단이 끊긴 지점까지 다시 와서 잘 보니 다른 방향으로 아주 좁은 숨겨진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다시 멀쩡한(....이라고 해도 여전히 이상) 길이 나오고 그 끝에 멀리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 반대편은 차도와 이어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경우는 차로 오는 곳인가 보다. 삼청동 팔각정 산 타서 올라간 셈이다.... 전망대 꼭대기에서는 전문장비를 갖춘 사람들 몇 명이 석양과 야경을 찍으려고 준비중이었다. 멀리 보이는 구름 너머로 해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