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기, 넷째날
긴린코를 더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었지만 추워서 도무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돌아갈 때까지 3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뭘 할까. 우선 그 근처를 한 번 둘러보았다. 풀숲 사이에 좁고 경사진 계단이 있었는데 나가사키에서 된통 당했던 걸 그새 잊어버리고 또 호기심에 올라가보고 말았다. 다행히 계단은 금방 끝났다. 개 조각상이 무서운 표정으로 지키고 있는 작은 신당같은 것이 있었다. 무슨 신인지도 모르지만 기복신앙의 한국인답게 온갖 잡다구리한 소원을 또 잔뜩 빌었다. 개를 부리는 신이니 나쁜 신 아니겠지 뭐. 신당 건너편 저 멀리 숲속으로도 길이 나 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의 모험은 여기까지만.
내려와서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낡고 허름한 정체불명의 건물이 있었다. ‘주민 전용 공공 온천’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역시 호수에서 나오는 물이 온천 맞는가보다. ‘들여다보지 마시오’라고 쓰여있지만 창문이 열려있어 쓱 하고 봤는데, 탈의실이고 뭐고 없이 그냥 바로 목욕탕!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시설은....뭐랄까....여름에 포항 놀러갔을 때 바닷가에서 놀다가 평상을 빌려준 민박집 샤워시설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그 샤워시설에 발목까지 오는 깊이의 목욕탕을 추가한 듯한 느낌이었다.....혹은 영화 속에 등장하던 대공분실 느낌도 살짝 나고. 아니면 유성온천역에 있는 무료 족욕장 주변에 천막을 둘러놓은 느낌도 나고.
아무리 나라지만 저길 갈 수는 없어서 다른 곳을 찾아봤다. 검색해보니 숙박객이 아니어도 입욕이 가능한 온천이 꽤 많다고 하여 계획에 없던 온천욕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계획에는 없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미리 수건을 준비해 왔지. 후후후. 수건을 빌리려면 300엔인가를 내야하기 때문에 미리 한국에서부터 쓰고 버릴 수건을 가져왔었다. 입욕비는 430엔으로 생각보다 굉장히 저렴했다. 430엔에 노천탕을 즐길 수 있다니!! 하고 탕으로 갔다가 그만 또 한번 깜짝 놀랐는데, 탈의실은 역시나 해변가에 설치된 간이 시설 비스무리하게 허름하고 아담했다. 성인 4-5명만 들어서도 꽉 차는 좁은 공간이었다.
어쨌든 옷을 벗고, 이제 슬슬 온천을 해볼까, 드디어 포스터에서 많이 보던 본격적인 일본온천인가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탈의실 바깥은 바로 야외였다. 맨살에 칼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온천으로 들어가자. 그런데 온천도 머리 속 이미지, 어디 저 깊은 골짜기 나무와 풀로 겹겹이 둘러싸인 은밀한 공간, 와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 고급 여관에서 갔던 노천탕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어쩌면 비싼 요금을 내는 숙박객과 일반 이용객이 사용하는 시설이 다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여긴 그냥 돌을 대충 쌓아 탕을 만들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놓은 상태라서 밖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마음 먹고 들여다보려면 충분히 볼 수 있을 듯 했다. 뭐 이젠 나도 아줌마가 되었는지 볼테면 봐라 뭐 어쩔거야 싶은 생각이 있다. 얼마 전 서울에서도 술집 화장실 여기 저기 휴지로 막혀있는 구멍을 보고서 새삼 몰카의 왕국에 살고 있단 실감이 났었지만, 남이 똥싸는 거 보면 너만 손해지, 라는 생각으로 그날도 열심히.....이하생략.
온천 물이 뜨거운데도 공기가 워낙 차다보니 수온이 금방 금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탕 안에서는 너무 추워서 얼굴만 내놓은채로 앉은 채로 이동했다. 풀숲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잃었는지 원래 여기가 자기 구역인지 들어와 있었다. 귀엽고 반가워서 우쭈쭈 하고 부르니 눈을 엄청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쳐다본다. 마치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웃겨 죽겠다고 혼자 깔깔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내 모습 같았다.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는 와중에 찰칵 소리가 났다. 새로 들어온 여자 두 명이 노천탕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딱 봐도 한국 사람이다. 사진 찍지 말라고 하니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그 와중에 사람 없는 부분 찍었다고 변명을.... 에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어서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노천탕 돌이 까슬해서 엉덩이도 아프고, 슬슬 땀도 나고, 여자애들도 거슬리고 고만 나가야지.
나와서는 상점가를 다니며 구경했다. 뭐 하고 싶어서 했다기 보다는 너무 추워서 어디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메뚜기처럼 가게들이 눈에 띄이는 족족 들어가서 구경했다. 몬치치라는 엄청 못생긴 인형을 파는 가게에 들어갔는데 주인 아저씨 말로는 한국인들 사이에 대인기라고. 정말이냐....
작은 동물을 몇마리 모아놓은 플로랄 빌리지 라는 곳에서는 한 아빠(일본인)가 유모차를 탄 아이에게 염소를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다. 아빠가 귀엽지? 귀엽지? 염소랑 같이 사진 찍을까? 하는데 뚱하기 이를데 없던 아이는 코가 움찔움찔 하더니 그만 울어버렸다. 아이 아빠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눈으로 대화했다. 당신의 마음을 나도 압니다.
간장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을 지나면서는 다시 한 번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간장 아이스크림.....맛이 없을 것 같아....근데 너무 궁금해....검색해보니 후기도 거의 없어.....먹고나서 후기를 남기면 내가 거의 최초!! 간장 아이스크림이라니 너무 힙해. 하지만 맛이 없을 것 같은데....게다가 벌꿀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배도 부르고 춥고 벌꿀이랑 간장 둘 다는 못먹겠고....벌꿀 아이스크림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극찬하는 거라 당연히 맛있을텐데. 벌꿀이냐 간장이냐. 대세냐 힙스터냐.
그 이후로도 한참을 엄숙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벌꿀 아이스크림을 먹고 말았다. 엄청 맛있었다. 부드러운 우유 아이스크림 위에 벌꿀이 듬뿍 뿌려져 한 입 떠서 먹으면 위 아래 어금니 사이에 벌꿀이 촉촉이 고이는데, 하도 진해서 씹는 느낌이 날 정도였다. 역시나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역시 대세를 따르길 잘했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간장 아이스크림 에 대한 아쉬움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맛일까. 의외로 맛있을지도 몰라. 소금 초콜릿처럼. 간장 vs 벌꿀의 고민은 마치 내 인생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힙스터가 되고 싶지만 대세도 따르고 싶어. 새로운 것은 해보고 싶어 갈등하고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안전한 것을 택하는 삶.
그날 저녁 남편에게 카톡으로 이야기했더니 간장도 먹어보지 그랬냐고. 배불러서 둘 다 어떻게 먹어. 먹다가 남기면 되잖아.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