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기, 넷째날
후쿠오카는 먹고, 놀고, 쇼핑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도시이지만 막상 관광지랄까, 명소라고 할 만한 곳은 별로 없다. 물론 먹고, 놀고, 쇼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므로 상관없지만. 하여간 그나마 후쿠오카타워와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다자이후 텐만구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현지인들도 후쿠오카에 볼 거 없지 않아? 뭐하고 놀았어? 하고 묻는 수준. 그래서 보통 후쿠오카에 놀러오는 사람들은 일정 중에 같은 큐슈 내의 가까운 지방에 많이 놀러간다. 당일치기도 있고, 아예 이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뭐 가깝다고 해도 버스로 짧게는 한시간 반, 길게는 2시간 반 가까이 걸리는 곳들이다.
많이들 가는 대표적인 장소로는 엊그제 다녀온 나가사키가 있고, 그 외에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두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유후인과 벳푸가 있다. 둘 다 온천지역으로, 같은 일본내에서도 수학여행 등으로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구마모토, 미야자키, 가고시마, 등등. 하여간 큐슈에는 그간 왜 안왔을까 싶을 정도로 가고싶은 곳이 너무나 많다. 그런고로 이번에 4박 5일간의 일정을 짜면서 나를 엄청난 번뇌에 빠트렸던 것이다. 일단 나가사키는 가기로 정했으니까 하루 빼고, 우리 애들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니 다자이후 가는 날 또 하루 빼고, 그럼 딱 하루 남는데 이 날 어디를 갈 것인가.
미야자키나 구마모토는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하이킹을 해야한다고 하여 패스하고, 벳푸는 나중에 가족들하고 같이 와서 자고 싶으니 빼고, 하면서 제하다 보니 남는 곳이 유후인, 다케오, 히타 정도. 그런데 많이들 가는 유후인을 갈까 생각하다보니 또 갑자기 마음 속의 힙스터가 깨어나는 것이다. 유후인? 사람들 다 가는데 거기 가서 뭐하려고? 여관에 묵을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특이한데 가고 싶지 않니?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재미가 있겠어?
해서....아는 사람이 많지 않는, 후쿠오카에서 유후인 가는 도중에 있는 히타라는 마을에 갈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으나, 또 갑자기 마음 한 쪽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유후인 안 가보는 거 아쉽지 않아? 남들 모르는데 가서 뭐하려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거기 가서 자전거를 탈거야 하이킹을 할거야. 카페에서 책을 읽을거야 어쩔거야. 그런데 거기 괜찮은 카페나 있으려나? 사진 보니 길에 사람도 안다니고 다 논밭이더만! 지난번처럼 힙스터짓하다가 또 조난 당할래!!!
사실 유후인이 썩 끌리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고베 근처의 아리마, 이시카와 현 카나자와 근처의 온천마을에 갔던 경험이 있어서였다. 그러다 유후인에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이 된 호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보고 마음 속의 힙스터는 결국 대세를 따르고 싶은 마음에 굴복하고 말았다. 예전에 겨울연가의 배경이 되었다는 이유로 남이섬에 단체로 놀러오는 일본인 아주머니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아니, 배경은 배경일 뿐 여기 욘사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와?) 나야말로 지금 영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된 유후인으로 향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렸을 뿐인데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 간 줄 알았다. 옷을 다섯겹(내복, 니트, 조끼, 경량패딩, 코트)이나 입었는데도 어마어마하게 춥다. 심지어 눈까지 내리고 있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맛있다고 소문난 고기집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걸 보았지만 정신이 혼미했던지라 그냥 옆에 있는 집에 쓱 들어갔다. 따뜻한 소바를 맥주와 함께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며 약간 정신을 차리고, 긴린코 호수공원 가는 길을 찾아봤다. 어디 저기 산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마을을 가로질러 가기만 하면 됐다. 마을은 전주 한옥마을처럼 이런 저런 소품들과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날이 좋을 때는 아마도 매우 붐빌 것 같다.
중간에 전국 고로케 대회(별 대회가 다 있다 진짜)에서 금상을 받은 집이 있다고 하여 먹어봤다. 오오....겉모습은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는 고로케인데 내공이 엄청나군. 간이 완벽했다. 튀김은 기름에 바싹 익혀 바삭바삭한데도 전혀 느끼하지 않었다. 안에 들어있는 소는 아주 부드러워 목넘기는 느낌도 좋았다. 금상을 받을만 하구만!
주변의 가게들이 궁금했지만 일단 버스표가 없어서 여유시간이 4시간 정도밖에 없으므로 나머지는 긴린코를 보고 돌아나오면서 천천히 구경하자는 생각으로 서둘러 걸어가는데 벌써 도착해버렸다!!! 마을에서 호수까지의 길이 생각보다 엄청 가까웠다. 빠른 걸음이면 10분, 보통 속도로는 20분 정도. 인터넷에서 유후인 보는거 얼마나 걸리냐는 질문에 자기는 긴린코 보는 것만 2시간 걸렸다고 쓴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대체 뭐지? 명상이라도 한 것인가.
긴린코 호수는 생각보다 아주 작은 호수였다. 크기만으로 따지면 어지간한 공원에 가면 있는 큰 연못 정도의 크기였다. 다만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과 나무들이 호수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었다. 호수에서는 은은하게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온천수인 것일까? 추운 날에도 잉어며 오리가 유유자적하게 헤엄을 쳤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여러 색깔의 나뭇잎들이 아주 천천히 물결무늬로 일렁거렸다. 호수 위로는 자잘한 눈송이가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정말 저 산 어딘가에 뭔가 신비한 것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