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자기 일기는 자기 일기장에

큐슈 여행기, 마지막

by 한승혜

돌아가는 날이라 잠을 설쳤다. 4시 넘어 잠들었다가 알람소리에 화들짝 일어났다. 이제 짐을 싸야 한다. 올 때는 12키로로 왔는데 갈 때는 과연 몇 키로가 나올 것인가.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잠옷을 과감히 빼버리기로 한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일본백수 같다고 했던 옷이네. 일본백수같은 옷답게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는구나. 아직 5-10회분 가량 남은 것 같은 샴푸랑 바디워시 통도 버리기로 한다. 잘 안 씻기는 폼클렌져도.


도대체 왜 여행을 오며 책을 4권이나 챙겨왔을까. 그것도 400p, 500p 되는 것들을. 무슨 자신으로 저걸 다 읽을 생각을 했던 것인지. 사실 오기 전에는 그랬다. 비행기에서 한 권 읽고, 여기 저기 맛집 대기하다 보면 또 한 권 읽고,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한 권 읽고, 혹시 다 읽고 나면 심심할지 모르니(...) 비상용으로 한 권을 더 챙기자, 4박 5일 여행을 가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는 비행기에서는 피곤해서 떡실신하고, 고속버스에서도 떡실신하고, 간혹 깨어있는 시간에는 일기 쓰고, 결국 한 권도 못 읽고 간다. 도서관 책이라고 다 읽고 버리고 가지도 못한다고 불평했는데 도서관 아니고 내 책이었어도 못 읽어서 못 버렸을 듯.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데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


일단 캐리어에 전부 넣었다가 공항에 있는 저울에 재보고 보조가방에 옮겨 닮기로 했다. 하도 안 들어가서 몇 번을 쏟았다가 담으며 열심히 테트리스를 했다. 그렇게해도 안 들어가는 것들은 배낭에 꽉꽉 쑤셔넣고.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옷은 그냥 다 껴입어 버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옷을 하도 많이 입고 무거운 것을 끄느라 하나도 추운 줄 몰랐다. 아아 다음부터는 그냥 대한항공 탄다. 진짜.


공항에 가서 무게를 달아보니 배낭 제외하고 30키로. 저가항공의 수하물은 15키로까지만이므로 말하자면 15키로를 다시 빼서 들고 가야 하는 것이다. 후우........ 사실 추가로 나오는 수하물 비용이라고 해봤자 아마 올 때처럼 4~6만원 선 정도라, 그냥 돈 내고 편히 오지 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왜 예정에 없던 금액을 쓰는 것은 이리도 아까운지. 그렇게 하면 저가항공을 타고 온 의미가 없어지므로 꾸역꾸역 땀을 흘리며 또 다 들고 가는 것이다. 사실 이미 대한이나 아시아나랑 같은 값 내고 와버림. 내가 진짜 다음부터는 아시아나 탄다........


하여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출국 수속을 하고 더 이상 짐을 늘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도 목이 말라 왔던 스타벅스에서 그만 시티 머그 컵을.....시티 컵은 부피를 너무 많이 차지해서 더 이상 모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일본 버젼은 정말이지 안 봤을 때는 몰라도 한 번 눈길을 주면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아이돌 그룹과도 같았다. 현 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다른데 그게 또 하나같이 개성이 살아있고 추억을 상기시킬만한 문양이 들어있어서 안 사고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근데 스타벅스 시티 머그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몇 년 전에 남편한테 출장 갔다 오는 길에 스타벅스 시티 머그 사오랬다는 포스팅 밑에 난 진짜 스타벅스 컵 사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가던데, 그거 하나도 이쁜 줄 모르겠고, 라고 댓글을 적은 사람이 있었다. 그 때는 그냥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요 하고 넘어갔는데,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누가 너한테 사다달랬냐고. 누가 너한테 스타벅스 머그 사라고 했냐고. 여기 이분에게 스타벅스 컵 어떤지 물어보신 분????????????? 안물안궁 네 생각은 네 일기장에나 쓰라고. 그러고보니까 그전에도 5-6살 무렵 혼자 버스 타고 다녔다는 글에도 느닷없이 등장해서 우리 땐 다들 혼자 다니지 않았어요? 요즘 부모들이 완전 과보호인 것 같은데요? 하고 말했지. 대체 그런 댓글을 적는 의도가 뭐냐고요. 우리 땐 다 그랬으니까 그딴 걸로 잘난 척 하지마. 뭐 그런 거냐? 억울하면 너도 해, 잘난 척. 또 전에는 내가 박근혜한테 모자 씌우라는 이야기 들었을 때의 전여옥 심경이 이해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봤을 때는 전여옥이 더 이상하다나? 한참 전 일을 아직까지 꽁하게 품고 있는게 옹졸해 보인다고 했지? 그런 댓글을 적으면 그 포스팅을 한 내가 뭐가 되냐. 제발 너의 개인적인 생각은 네 일기장에 쓰세요. 여기까지 와서 이러지 말고. 아, 네 일기장에 적으면 봐줄 사람이 없나? 아무도 안 봐주니까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야? 에휴, 페친 되자마자 메세지 보내서 2시간 동안 지 얘기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외로워서 그런가부다 하고 많이 참아줬다. 내가 뭔가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들었던 거 같은데 그럴 거면 안 보면 되잖아? 매번 스토커처럼 일일이 살펴보고 간섭하고 참견하지 말고.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문제되는 내용 아니면 자기 의견이랑 안 맞아도 그냥 좀 넘어가셈. 뭐가 맛있다(없다) 뭐가 재미있다(없다) 뭐가 좋다(싫다)는 글에 와서 초치지 말고. 취존 플리즈!!!!!!


라고 말해도 이젠 차단해서 못 보겠지만. 흠, 하여간에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가 스타벅스 머그를 보고 갑자기 흥분해버렸네. 앞으로는 건드는 사람은 물 것이다. 물론 건들지 않으면 물지 않아요.


양손에 짐 한 보따리를 가득 들고 드디어 돌아간다. 여행은, 특히나 혼자 하는 여행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순간의 연속인 것 같다. 나약한 나, 비겁한 나, 우유부단한 나, 사교성이 없는 나, 어리석은 나, 외로운 나. 그런 한편으로는 용감한 나, 강인한 나, 다정한 나, 현명한 나, 성실한 나와 같은 멋지고 강한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싫은 점과 좋은 점을 번갈아 직시하고 자잘한 좌절과 성취가 반복되면서 스스로에 대해 좀 더 깊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것에는 늘 자신이 없었다. 마치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어떤게 나의 진짜 모습인지 몰랐고, 초라하고 시시한 나를 남들이 알아볼까 두려웠다. 그래서 타인에게 쉽게 영향을 받았다. 주변에서 좋아보이는 것이 있으면 곧잘 따라하기도 하고, 쉽게 흔들렸다. 본연의 모습(이란게 있을지 모르겠지만)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과 생각들을 하며 공허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괴감이란.


그나마 조금씩 나아진 건 여행을 다니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혼자 여행을 다니며, 그 개고생(?)하는 과정에서의 추억과 작은 모험과 도전과 실패와 성공들이 스스로를 조금 더 좋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홀로 여행을 하며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또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는데, 주로 안전하고 것 위주로 하던 선택이 조금 더 모험을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음식도, 장소도, 사람도. 이런 경험은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다.


큰 탈이나 사고 없이 여행을 무사히 마쳐서 기쁘다. 이 모든 것이 무려 4박 5일이나 자유시간을 허락해 준 남편 덕분이다. 이십대의 절반을 쏟아부은 일본인 만큼, 이런 저런 추억 때문에 갬성에 젖을 일도 많았는데, 정말이지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매년 한 번씩 다녀오라는데, 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세종대왕 뭐 이런 사람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장영실이라도.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이들이 엄마 하고 소리지르며 뛰어왔다. 팔을 크게 벌리고 아이들을 꽉 껴안았다. 아이들 정수리에서 따뜻한 냄새가 났다.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큐슈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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