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를 읽고
한 노부인이 지하철에 오른다. 머리는 희끗하고 옷은 낡았지만 단정하다. 비어있는 노약자석을 찾아 앉고는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든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어느 지하철을 타도 보일 법한, 그런 평범한 할머니. 그런데 사실 그 할머니의 정체가 살인청부업자라면?
킬러나 스파이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많지만 당연하게도 작품 속 그들은 모두 젊다. 물론 60세가 되어서도 현역으로 뛰는 톰 크루즈가 있지만, 현실의 그와 무관하게 캐릭터로서의 그는 암벽을 아무렇지 않게 등반하고 뛰어서 비행기를 뒤쫓는 팔팔한 청춘인 동시에 마주치는 모든 여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마성의 남자이이기도 하다.
구병모의 <파과>는 젊을 때는 잘나갔지만 더 이상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관절에서 소리가 나고 기억력도 깜빡깜빡 하는, 그럼에도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나이든 살인청부업자, 심지어는 여성, 그러니까 할머니 킬러가 주인공이다. 그런 반면 그에 대적하거나, 애정의 대상이 되는 남성들은 모두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클리셰를 한껏 비튼 독특한 소재에 구병모 특유의 문장이 결합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가 넘어간다.
남성들 중에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 구병모 작가를 추천하고 싶다. 자기연민과 감수성 따위는 개에게나 주라는 듯 신랄하고 거침이 없다. 창조적이고 거침없는 욕설은 통쾌하다. 읽다보면 캐릭터도 내용도 사뭇 다름에도 불구하고 웹툰 <먹는 존재>의 유양을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고, 어디에도 없었던 여성 캐릭터는 놀라웠다. 액션씬의 묘사는 디테일하고도 화려해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역시 갓갓 구병모.
제목에 대한 언급은 작품 어디에도 되지 않지만, 아마도 ‘으깨진 과일’이 아닐까 싶다. 다 읽고나니 꽤나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한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바라선 안 되는 나날을. -p.34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 p.264-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