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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Dec 26. 2015

'SF'가 흙수저를 다루는 3가지 키워드

언문독해3. 낸시 크레스 '스페인의 거지들'

낸시 크레스에게 첫 휴고상을 안긴 단편 '스페인의 거지들'



퇴근│고단한 노동자의 페북


해가 졌다.


날숨을 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내연기관의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뚜벅뚜벅 길을 건너며 목도리를 코 밑까지 끌어올렸다. 손이 시렸지만 아직 오래된 장갑을 옷장에서 꺼내지 않았다. 나는 나를 여의도에서 떠나게 해줄 파란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 속 파란 아이콘을 눌렀다. 사람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페이스북에는 자세히 나와있었다. 아주 부유한 친구들이 반쯤 벌거벗은 채 하늘색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진을 올려두었다. 친절하게도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지도도 링크되어 있었다. 나는 남쪽 나라 어디엔가 있는 그 섬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었다. 영어가 아닌 듯 철자 배열이 낯설었다. 딱딱한 초콜릿을 와작 깨물었다.


조선의 금수저


추위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위도가 다른 더운 곳의 사진을 보자니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성냥을 사지 않았다. 현대인들도 신문을 사지 않았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팔며 가난을 모면해보려는 시도를 동화랍시고 쓴 안데르센이 기특했다. 멀리 새파란 버스가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달려왔다. 유리창 앞에는 친절하게도 여의도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이 섬의 이름은 다행히도 낯익었다. 어금니에 들러붙은 초콜릿이 소름 끼치게 달았다. 그런데 성냥팔이 소녀는 어떻게 됐더라...


사탕이 아닙니다. 성냥입니다 / 세계명작동화


유전자│왕후장상의 씨를 따로 만들자


금수저, 흙수저, 양극화 그리고 기타 등등. 아무튼 지겹다. 빤하다. 흘러간 제3의 길이나 위세 있는 신자유주의나 고상한 말로 포장했지만 그게 그냥 부자를 계속 부자로 살게 해 주자는 것인 줄도 다 안다. 어느새 '가난'과 '부'는 '유전자'에 새겨졌다. 이 문장이 지금은 은유 일지 모르겠지만 유전공학이 발전하면 사실이 될 수 있다. 낸시 크레스의 '스페인의 거지들'이란 소설에서는 과학자들이 왕후장상의 씨를 제조한다. 삼성가의 몇 대손이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긴 목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목이 긴 이씨들의 왕국. 가난한 사람들은 기린 가족이 잎을 다 뜯어먹은 황량한 나무 위에 올라가 하릴없이 지는 해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높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나무를 앞에 두고, 기린 가족은 미어캣 무리에게 '공정한 경쟁'을 강조한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를 쭉 빼도 미어캣은 50cm를 넘지 못 한다.  


떡볶이/MLB파크


공정한 경쟁│신촌역 떡볶이 맛의 비법


떡볶이는 매우 맛있다. 신촌역 근처에는 초록색 주황색 방수포로 치장한 분식 포장마차가 많다. 나는 6번 출구 쪽 포장마차를 추천하는데, 자작한 국물이 알맞게 졸아서 떡이 적당히 맵고 간이 잘 배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고작 2500원에 천하일미를  맛볼 수 있는 이유는 '미원' 때문이다. 수십 군데의 포장마차가 각기 다른 소스와 조리법을 무기 삼아 신촌의 입맛을 공략하지만 이들의 기본 베이스는 '미원'으로 동일하다. 만일 엄청난 노점 재벌이 등장해서 홀로 미원을  독차지한다면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하다. 미원을 가진 자는 2500원에 떡볶이를 팔 수 있지만, 미원이 없는 쪽은 남도의 다시다를 정성스레 삶아 바지락을 넣어 육수를 내야 한다. 값은 두 배로 뛴다. 미원을 차지하기 위해 평화로운 신촌의 노점상 공동체는 붕괴될 것이다. 미원을 파는 마피아가 신촌을 장악할 게 분명하다.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불공정한 경쟁은 '공동체'를 망친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소설 속 금수저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그러니까 평범한 '수면인'보다 하루가 8시간 더 긴 것이다. 이들은 공부도, 운동도, 놀이도 8시간 더 할 수 있다. 더 똑똑하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다. 혼자만 '미원'을 친 떡볶이를 파는 것이다. 그런데 '불면인'들은 '수면인'과 공정한 경쟁을 한답시고 똑같은 대우를 바란다. 더 뛰어난 자신이 더 많은 연봉과 더 많은 기회를 차지하는 게 당연한 '거래'의 원리라고 강변한다. 화가 난 '수면인'들이 이들을 때리고 적대시한다. '불면인'들은 세상과 격리된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려는 시위대를 피해 부자들이 남태평양의 휴양지로 피신할 때, 무너진 것은 '질서'가 아니라 '공동체'다.


한국거지 / MBC


합리적 거래│스페인 거지와 적선


사람들은 왜 거지에게 돈을 주는 가. 소설 속 '불면인'들은 이 세상은 '합리적 거래'로 이뤄져 있고,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할 땐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한다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자'다. 이들은 '스페인의 거지에게 왜 적선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자신의 능력이 불공정하게 주어졌지만, 자신의 능력은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모순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이들은 아마도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리라.


거래의 순환이죠. 모두는 계약으로 묶이지 않아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예요. 말에게도 물고기가 필요할까요? 그럼요. (중략) 스페인에는 아무것도 거래하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지들이 있어. 하지만 스페인에는 거지만 있는 게 아니야. 거지한테서 물러난다면, 우리는 그 나라 전체에서 물러나는 셈이 돼. 도움의 순환 가능성에서 물러나는 거야 / 스페인의 거지들


말에게도 물고기가 필요해요 / AMERICAN PHOTO


말에게도 물고기가 필요하다. 말은 풀을 먹고 풀은 비를 마시고 비는 구름에서 나오고 구름은 바다를 머금는다.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물고기가 끊임없이 영양분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낸시 크레스는 거래는 선형적이지 않고 순환하기에 사람은 '스페인 거지'에게 적선한다고 소설을 마무리한다. 말에게 물고기가 필요하듯, 부자에게도 거지가 필요하단 뜻이다.


다만 나는 찜찜하다. 순환이든 선형이든 굳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거래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거래'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하게 말해서, 나는 거지가 필요해서 적선하는 게 아니라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다. 연민이 거래보다 우선할 순 없는 건가. 인간이 필요보다 먼저일 순 없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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