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의 궤적│철없이 사랑인 줄 알았네.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 그 사람
정치는 회전목마│回轉木馬는 政治
푸른 바다 빛은 어느새 다 사그라졌다. 복사뼈 높이까지 자라 발목을 폭 감싸안던 잔디밭이 가을이 지나자 물 먹은 머리카락처럼 푹 숨이 죽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빳빳해서 사각거렸던 청량한 잔디는 간데없고 빛바랜 갈색 잔해만이 버건디색으로 물들인 소가죽 구두 밑창에 들러붙었다. 이따금씩 예리한 바람이 면도날처럼 볼을 할퀴었다. 국회의사당에서 벌써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민트색 돔은 여전히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막 퍼낸 피스타치오 아몬드 마냥 구김 없이 동글동글했다. 희미한 잿빛 담배냄새도 변함없이 들숨을 파고들었다.
인생은 회전목마, 서글픈 엔카 선율이 묻어있는 일본식 관현악을 들으며 국회 본청 앞 너른 뜰을 걷고 있자니 반복되는 권력의 파열음이 어쩔 수 없어 기분이 헛헛해졌다. 친노(친노무현)와 비노(비노무현)가 갈등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깨져버린 것이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이 맞서다 새누리당이 갈라질 것만 같은 요즘 생각해보니 계절이 돌고 돌 듯, 지구가 뱅그르르 태양 주위를 선회하듯, 쥐고 빼앗고 탈취하고 잃고야 마는 권력의 다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회전목마처럼 결국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도 용맹한 군마 인양 오색 찬란한 빛깔로 색칠한 눈속임이 국회 곳곳에 난무했다.
소리가 턱 막힐 때마다 잃어버린 젠하이저 이어폰이 그리워졌다. 귀에 구겨 넣은 싸구려 이어폰은 관현악단의 장엄한 연주를 감당하지 못했다. 생생한 화음으로 도쿄 롯폰기 리사이틀홀을 가득 채웠던 음표들은 바나나가 컨테이너에 처박히듯 압축파일에 꾹꾹 눌려 담겼다. 이윽고 서버에 업로드된 음표들은 광케이블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도쿄에서 서울 혜화동 전화국까지 건너온 뒤 무선인터넷에 올라탔다. 불행하게도 몇몇 음표들은 음악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내게 와 싸구려 번들 이어폰으로 재생되어야만 했다. 긴 여정 끝에 지친 음표들은 생기를 잃어 불쑥불쑥 고막을 할퀴는가 하면 고음에서 무참히 찢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젠하이저 이어폰이 그리울 것 같았다. 그들은 장중하고 비극적인 누아르를 반복하고 싶었겠지만 싸구려 향수를 타고 재생된 것은 박근혜 정부라는 희극적인 코미디였다. 도저히 '길라임' 앞에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무도하게도 가짜 길라임 박근혜 대통령은 원조 길라임 배우 하지원 씨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무참한 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예쁘다는 이유로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주는 마녀가 실제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정치가 무거움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발리우드식 뮤지컬로 변해버렸다. 르네 마그리뜨 식으로 신문 1면에 "이것은 유머 모음집이 아니다"라고 써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심수봉처럼 하지원도 방송정지당하는 거 아냐" 홍대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옆 테이블 아저씨들이 킬킬대고 있었다. 다시 나라에 먹구름이 끼고 광화문광장에 우레 같은 함성이 몰아치자 사람들은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18년간 법도 원칙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이다가 결국 자신도 죽어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을 곱씹었다. 최순실에게 나라를 갖다 바친 박 대통령을 보며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흘러간 옛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철 없이 사랑인 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 할 그때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