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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Feb 18. 2018

'남북단일팀' 돈도 안 되는 애국 따위

류근 시인에게 남북단일팀을 욕해 혼난 청년을 대신해

층이 나뉘어 유리된 물과 기름. 그날 두루치기 집에 앉아있던 청년들은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물이 된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잔을 쥐고 흔들어봤자 잠깐 섞이다 이내 다시 가라앉는 물. 항상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자신의 분자구조를 누가 만들었을까 까닭을 알 수 없어 들끓었을지도 모른다. 고추장에 재워 둔 싸구려 돼지고기를 씹고 알코올을 희석한 소주를 마시다가. 나를 절벽에서 밀쳐낸 용의자는 누구인가. 알 수 없어 대통령의 이름을 들먹이며 마구잡이로 욕지거리를 해댔을지 모른다.


나라를 욕할 땐 주변에 386이 있는지 보자


류근 시인은 13일 페이스북에 '남북단일팀'을 욕하는 청년들과 '한바탕'했다고 글을 올렸다. 시인은 두루치기 집에서 청년들이 "저렇게 실력 없는 애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만들어서 (평창올림픽을) 세계인의 웃음거리로 만든 문재인 정부 놈"이라고 욕하자 "우리 젊은이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뭉쳐 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냐" "지면 좀 어떻나"라고 맞받아쳤다고 했다.



너무나 시 같은 문장이었다. 지면 좀 어떻나. 태양풍이 쏟아지는 달의 뒷면에 서서 반짝이는 은하수를 향해 유영하자는 말처럼 달콤했다. 시적 상상력이 아니라면 도저히 빚어낼 수 없는 글이었다. 지면 좀 어떻나. 지금까지 살아온 서른 해를 찬찬히 되짚어보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기자의 문장으로는 쓸 수 없는, 완벽한 시인의 문장이었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감각도 있는 법이었다. 올림픽 둥이로 태어난 나는 태극기 부대는 물론 386세대의 애국심에도 공감할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 통일을 위해 평화를 위해. 일개 시민이 메달권도 아닌 올림픽 종목 출전권 따위 포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태도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오만해 보였다.

나라가 잘돼서 생활이 펴면 나도 애국합니다


국가의 번영이 내 계좌의 입금으로 이어지면 애국이 쉬울 터였다. 태극기 부대든 386세대든 세부는 다르겠지만 나라의 성장이 곧 개인의 성장이었다. 외환위기 전(85~97년)까지만 해도 실질임금 증가율(7.5%)이 생산성 증가율(6.6%)을 앞섰다. 국가 GDP가 올라가면 내 월급은 그보다 더 올랐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이후(98~12년) 실질임금 증가율(2.3%)은 생산성 증가율(4.2%)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내가 취직한 2015년에는 실질임금 증가율(0.9%)이 실질 GDP 상승률(2.8%)의 삼분의 일까지 폭락했다. 이듬해 실질임금 증가율은 0%를 기록했다. 나라가 부유해지든 말든 나와는 완벽히 상관 없어진 것이다. 차라리 브라질이나 베트남이 잘 되길 바라며 신흥국 펀드에 투자하는 게 나았다.


최선을 다해 뭉쳐 뛰는 건 의미가 없다. 지면 많이 아프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회사에서 수도 없이 듣는 말이다. 너도 나도 다 취업하던 시절에 산 사람은 모르겠지만 청년세대는 쟤가 취업하면 나는 밥 굶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룰이 목숨만큼 소중하다. 그런데 올림픽 출전권은 돈도 안 되는 애국심 따위로 흥정하려들고 은행은 VIP 자녀를 몰래 뽑는데 나라에서 운영하는 강원랜드는 신입사원 전부를 비리 채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좁은 드럼통 테이블에 둘러앉아 두루치기를 굽는데 옆에 있는 386 아저씨가 애국심을 가지라고 윽박지른다. 지면 좀 어떠나. 평화를 위해 그럴 수 있지. 거나하게 취해 훈계를 한다. 시인의 볼은 어쩌면 불콰할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이니 당연히 아름다울지 모른다. 그렇게 낭만적인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청년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고기를 굽는다. 돈도 안 되는 애국 따위야 아예 시인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도 우리는 전혀 신명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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