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지면 성추행 내가 만지면 정치공작
그 책은 종종 여자를 성기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지칭했다. 외설적인 삽화는 여자를 사람이 아닌 성적 장난감으로 묘사했다. 여자를 깔아뭉개고 가르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자는 내용이 구구절절 반복되었다. 고작 11살이었던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그저 단추를 밀려 채운 옷을 억지로 입은 듯 주저하며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멍청한' 여자가 '똑똑한' 남성 정치인의 접대부 혹은 씨받이로 등장하는 책을 읽으며 여자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런 나약한 감성이 남자답지 않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어른을 다른 차원에서 온 공명정대한 솔로몬쯤으로 여겼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는 책에 설마 나쁜 말이 있을까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여자는 열등하구나 알려준 그 책의 제목은 '딴지일보'였다. 1998년 무려 여성회관이라는 곳에서 읽은 책이었다.
딴지일보에 대한 나의 리뷰조차 김어준에게는 이명박근혜를 지지하는 보수세력의 공작으로 여겨질 터였다. 전형적인 피해망상 증상이었다. 사무실의 스테이플러부터 화장실의 전등갓까지 나를 공격하려 든다고 소리치는 환자와 성추문 폭로 운동이 정권을 뒤흔들기 위한 공작에 이용된다고 외치는 김어준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 발언이 발목을 잡을지 모르니 선제 공작에 나선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전자라면 아픈 사람이고 후자라면 나쁜 사람이었다.
중요한 점은 김어준이 아프든 나쁘든 성추행과 성폭행은 당한 사람이 아니라 저지른 사람이 비난받아야 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자유한국당의 지령을 받고 문재인정부 관계자의 성추문을 폭로했다고 해도 만진 사람이 죄인이지 알린 사람은 죄인이 아니었다. 정부 여당 관계자의 성추문을 폭로하면 정치공작이라는 김어준의 태도는 대단히 권력지향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서 그는 아픈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쁜 사람으로 보였다.
감히 여자가 사소한 성추문 따위로 남자가 하는 나랏일을 망치려 하느냐. 김어준의 태도를 보며 나는 외설적인 삽화가 가득했던 딴지일보를 다시 들춰보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제야 터져 나오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정치의 이름으로 공작이라 명명하며 다시 억압하는 그의 시선이 박정희를 닮았다. 경제개발을 해야 한다며 북한을 막아야 한다며 수많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리누른 과거의 옥음이 재현되는 것만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일렁거렸다.
다시 또 촛불을 들었는데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면 이제 무얼 손에 쥐어야 할까. 그는 황우석을 옹호하며 논문이 잘못되었다는 과학자의 증명을 정치공작으로 매도한 전적이 있었다. 대선이 조작되었다며 더플랜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논리적 허점을 웅장한 음악으로 퉁치기도 했다. 뛰어난 장외 엔터테이너가 어용 지식인 타이틀을 달자마자 과거 자신이 욕했던 권력자의 압제를 수줍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또 권력자를 위해 소수자의 입을 틀어막는 자가 지상파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정치를 논하는 세상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