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과 꽃뱀의 닫힌 결론
내 입을 씻고 싶어. 결혼을 앞둔 한 일간지의 여성 기자가 안희정 성폭행 보도를 보고 페이스북에 남긴 소회였다. 지독한 불신이 한 줄에 묻어났다.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는 매양 갈리지만 안희정에 대한 민주당 출입기자의 평가는 예외적으로 한결같았다. 지켜보니 괜찮더라. 괜찮다고 말한 그 입이 부끄러워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한 지지자는 자신의 손이 검어진 것 같다며 자조 섞인 말로 스스로를 원망했다. 나 역시 속이 허탈해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단 하루 만에 찌라시를 2개 받았다. 안희정의 정무비서 김지은 씨가 속된 말로 '꼬리를 쳤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김씨의 외모를 품평하는 댓글이 수백 명의 추천을 받아 상위에 올랐다. 참담했다.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마찬가지란 부연은 필요조차 없었다. 이런 추궁은 너무나 당연해서 없으면 의아할 지경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진보진영을 겨냥한 미투 정치공작이 나올 것이라는 김어준의 지저분한 입 탓에 김씨에게는 보수진영(혹은 당내 안희정 반대세력)의 정치공작원이라는 혐의가 추가됐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가 실패하면 여자의 외모를 품평하는 악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학습지를 펴고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을 반듯한 네모칸에 한글로 한자로 수십 번 받아 적었다. 4000년 전에 존재했다는 전설의 하(夏)나라는 말희가 예뻐서, 은(殷)나라는 달기가 예뻐서, 주(周)나라는 포사가 예뻐서, 오(吳)나라는 서시가 예뻐서 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정치는 왕이 했는데 나라는 미녀 탓에 허물어졌다. 어렸을 때 나는 그 압도적인 비논리에 의문을 제기할 새도 없이 모든 걸 외워야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남녀공학에 가면 여자애들이 남자를 홀리니까 성적이 떨어져"라는 소리를 듣고 남학교에 가야 했다. 남자가 공부를 못하면 그것도 여자가 예쁜 탓이었다.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애도 어른도 남자도 심지어 여자도 이런 이야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은 예쁘면 경국지색 아니면 억척스러운 꽃뱀이 되는 닫힌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외모가 뛰어나든 평범하든 남성이 실패하면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성폭력 자체만큼이나 폭로를 다루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걱정되는 것은 그래서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마땅히 반론할 수 있기에 성폭행 여부를 두고 사실 관계를 다투는 일은 마땅히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폭로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음지에서 신음하는 다른 피해자를 입막음하려는 의도로밖에 안 보였다.
이 모든 일은 진보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공작이 아니다. 진보진영을 지킨답시고 안희정을 향한 미투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야말로 진보진영을 허무는 정치공작범이다. 여권 인사를 향한 미투를 정치공작으로 프레이밍 해놓고 슬쩍 발 빼는 김어준과 여성가족부 장관의 거듭된 요청에도 탁현민을 자르지 않는 정부의 행태야말로 진보에 대한 믿음을 포슬거리게 만들었다. 정녕 진보라 자처하는 정부 여당이 진짜로 진보라면 지금이야말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스스로가 자유한국당과 다르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안희정의 성폭력이 사실인지 밝히고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과정을 그래서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두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