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램 아만다… 얼평으로 진화론적 우열 가린다는 나치적 우생학의 부활
쉬운 사랑 약속합니다 '소개팅앱'
소 몸통에 등급 새기듯 인간 얼굴에 별점 매겨
얼굴평가로 진화론적 우열 가늠? 나치식 우생학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결핍의 세계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이 존경스러웠다. 그 말은 트러플 오일과 같아서 폼 좀 잡아 보겠다고 아무 요리에나 쓰면 낯간지러운 허세가 되지만 요긴한 곳에 대담하게 버무리면 예사로운 맛도 천하일미로 북돋운다. 미숙한 요리사인 나는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느니 차라리 피하는 길을 택했다. 수많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 쓰니까 내가 더 보태지 않아도 괜찮다고.
돌연 페이스북을 보다가 태그 된 그를 맞닥뜨릴 때까지 그랬다. 맞잡아 쥐곤 했던 손가락 마디의 감촉이 환청처럼 불쑥 살아났다. 어느 날은 무심코 '나중에 말해 줘야지' 생각했다가 홀로 머쓱해지기도 했다. 과거가 급습한 뒤 기억의 잔해가 목련 잎처럼 짓이겨 나뒹굴었다. 그가 떠난 자리가 매립된 줄 알았는데 사실 겉만 굳은 싱크홀이 되어있었다. 언제 헛디뎌 그 아득한 낙차를 경험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를 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부재는 더욱 선명해졌다. 사랑이 없다고 쓰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무던히 반복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현대의 정보통신 기술은 새 출발을 쉽게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아만다, 글램, 정오의데이트 등 수많은 소개팅앱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쇼핑하 듯 쉽게 사랑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 앱은 신입 회원에게 반드시 얼굴 사진을 요구한다. 그리고 기존 회원에게 '얼평'(얼굴평가)을 요청한다. 많은 사람에게 잘생겼다고 평가받은 얼굴은 다이아몬드 회원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브론즈 회원이 되거나 가입 자체가 거부된다. 우시장에서 전기인두로 소 몸통에 등급을 새기 듯 신진 자본가들은 빅데이터 기술을 이용해 인간 골상에 등급을 매겼다. 이 새로운 시대에 못생긴 사람은 존재 자체로 죄인이었다. 17세기 청교도인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주홍글씨를 새긴 것처럼 21세기 자본주의자들은 못생긴 사람에게 낙인을 찍었다.
글램을 만든 안재원 큐피스트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을 등급으로 나누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대를 만나려고 한다. 등급이 높은 사용자 입장에서 등급이 낮은 이를 계속 소개받으면 손해라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없어진 줄 알았던 우생학적 골상학이 어느새 부활했다. 얼굴을 보고 진화론적 우열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언론에 내뱉어도 되는 세계가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진화론적으로 우등한 세계를 만들고 싶은 나치식 섹스중계상에게 등급을 매겨달라고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타인의 등급이 전시된 '얼평 백화점'에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돈을 냈다.
나 역시 손쉽게 사랑의 부재를 극복해보고자 앱을 깔았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자연스레 잔뜩 입꼬리를 올린 사진을 올렸다. 며칠간 쇼윈도에 전시되었고 쇼윈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한결같이 구김 없는 얼굴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들이 실업률이 치솟아 출산율이 주저앉고 자살이 횡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모든 미소가 절박해 보여서 스마트폰을 스와이프 하는 손가락이 자꾸만 멈칫거렸다. 스스로 욕망하지 못해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얼굴이 사실은 나의 것이었다. 전원이 꺼진 텅 빈 화면에 피곤한 표정 하나가 반사되었다.
사랑을 잊으려 되뇔수록 부재가 더 선명해지듯, 사랑이 쉽다고 외치는 앱 때문에 그 어려움이 더욱 세밀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쩌면 이 글의 주제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곳곳에서 반복되는 '누군가'라는 단어. 그러니까 주어와 목적어 자리에 똬리를 튼 '타인'이라는 존재가 사랑보다 더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그 중요한 자리에 타자가 아닌 나 자신을 놓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고백한 기형도 시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