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마음 조종하고픈 다크아콘
드루킹·국정원 마인드컨트롤 욕망 매한가지
마음을 빼앗긴 죄로 나는 지갑마저 털린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날렵하게 움직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고작 천 원짜리 몇 장 쥐고 다니는 중학생에게 PC방 값이 걸린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패배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노심초사 공들여 소환한 내 캐리어(항공모함)를 친구의 다크아콘(마법사)이 마인드컨트롤(세뇌)로 빼앗았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던 내 캐리어는 급작스레 반란을 일으켜 본진을 역습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하릴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고려 우왕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밤바람이 날카로웠다.
유닛을 세뇌하는 마법사 다크아콘의 이름을 한글로 번역하면 어둠(Dark)의 집정관(Archon)이다. 로마 공화정의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 집정관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뇌꾼의 본업은 정치인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염력으로 조종해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니. 정치인을 위한 디즈니랜드가 있다면 신데렐라 대신 다크아콘이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를 탄핵한 뒤 궁궐을 차지할 것이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는 해리포터 대신 다크아콘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야당을 향해 '아브라카다브라' 죽음의 마법을 쏘아댈 터였다.
이 모든 꿈이 그저 정치인의 상상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조금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부터 길바닥의 정치 야바위꾼까지 다크아콘을 꿈꾸며 유권자를 세뇌하려고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 장르로 구분하자면 박근혜정부는 코미디였다. 어떤 멍청이가 '내가 지금부터 너를 세뇌할게' 외치는 정부에게 마인드컨트롤을 당할까. 하지만 박근혜는 무려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춰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었고 당연히 아무도 세뇌당하지 않았다. 이명박정부는 누아르였다. 이름부터 중후장대 한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을 동원해 여론조작을 시도했다. 진보진영은 보수정권이 마인드컨트롤 작전에 국가 기관을 동원했다며 권력형 범죄로 규정했다.
하지만 가장 괴이한 장르는 문재인정부의 스릴러다. 일단 여론조작의 주체가 국가기관이 아니라 예언자라는 사실이 범상치 않았다. 이는 비유가 아닌데, 실제로 김어준은 예언자를 자칭하며 황우석부터 정봉주까지 수많은 음모론을 꾸며댔다. 그의 지지자들은 예언에 발맞춰 성실히 좌표를 찍고 댓글을 몰아주었다. 드루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송하비결과 자미두수 등 예언서를 들고 일본 침몰 등을 주장했다. 그 지지자들은 매크로를 돌려 추천 댓글을 조작했다. 물론 정부 여당은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고는 받았고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영이 자신의 댓글 작업이 여론조작이라는 자각이 없는데서 비롯됐다. 그래서 이 장르는 스릴러가 되는데, 영화 <디아더스>의 주인공이 유령이면서 스스로가 유령인지 모르고 유령을 무서워하다가 막판에 자신이 유령인 것을 알고 놀라는 것처럼. 민주진영은 여론조작을 하면서 스스로가 여론조작을 하는 줄 모르고 여론조작을 무서워하다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끝에 자기 자신이 여론조작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각종 예언자 무리들은 온라인 여론전이 보수정권의 권력형 범죄와 다르다고 항변했다. 그렇다면 비 권력형 범죄는 저질러도 되는 지 묻고 싶었다. 뉴스를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당사자가 아닌 척 조작해서 만든 댓글을 국정원이 썼든 예언자가 썼든 공정한 의사선택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박근혜정부 시절 황교안 총리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총리실로부터 소송을 걸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청와대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의 댓글과 이메일을 무더기로 받았다. 촛불 이전에는 정부 여당을 비판하기 힘들었는데 촛불 이후에는 정부 여당을 비판하기 힘들어졌다. 다크아콘이 없는 세상을 위해 촛불을 든 줄 알았는데 다크아콘이 바뀐 세상이 되었다. 내가 답이 없는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하고 있는지 가끔은 어리둥절했다.
인용논문 : 양혜승 경성대 교수 <인터넷 뉴스 댓글의 견해와 품질이 독자들의 이슈에 대한 태도에 미치는 영향>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