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그러하듯 나 역시 동남아는 우리나라 계절로 겨울 그러니까 지역의 날씨로는 건기에 방문했다. 8월은 우기의 정중앙. 밤늦게 도착한 터라 강한 비는 만나지 못했으나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그 언제라도 빗줄기를 내릴 것 같았다. 제법 비싼 팟타이 비스무리한 파스타(한국돈으로 4천 원가량 했던 던 걸로 기억한다.)와 달디 단 미얀미식 커피를 마시고 나와 차욱타지 파고다로 향했다. 높이 10m의 와불이 있는 곳으로 내가 식사한 식당에선 3-4km 거리였다. 걷기엔 멀고 택시를 타기엔 가까운.
태국에선 특히 방콕에선 주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했던 나였는데, 미얀마는 숫자부터 미얀마어로 적혀있어 외국인 여행객이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인도를 걷다 보면 클락션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뒤돌아보면 영락없이 택시 드라이버다. 또 하나같이 “Where are you going?”이라 묻는다. 미얀마 택시엔 미터기가 없기 때문. 목적지를 말하면서부터 흥정이 시작된다. 구글맵, 우버 등의 어플을 사용하면 대략적인 택시비를 알 수 있는데 나같이 흥정 바보한테는 쓸모가 1도 없다. 이미 붉은 치아의 드라이버들에게 기선제압당한 데다가 혼자 여행하는 외국인에겐 흥정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정해져 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알 수 있지만 나는 끝끝내 흥정왕으로 거듭났다. 물론 엄청난 학습료의 택시비를 지불한 이후에.) 목적지를 말하곤 5천짯에 택시를 탔다. 한국돈으로 3-4천원이니 기본요금이다 생각했는데, 여행을 하면서 현지 물가에 익숙해지고 보니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뭐, 어쨌든 이 호구는 편하게 차욱타지 파고다에 도착했다. 보수공사 중이라 온 몸에 침을 맞은 듯한 불상이 눈앞에 나타났고 허무함이 찾아왔다. 아 약간의 무서움도 있었다. 아마 크기가 주는 압도감과 경외감 없는 나의 태도에 대한 응징이었으리라.
불상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중에 뒤편에서 책을 읽는 미얀마 청년을 보았다. 괜스레 책이 읽고 싶어졌다. 불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데 저 멀리 사원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심을 다해 쓸고 닦는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데 사원 밖으로 거센 비가 쏟아진다.
내 생애 처음 보는, 너무나도 거센 비. 하늘이 구멍 났나 싶을 만큼 세차다.
휘둥그레진 내 눈을 보곤 나이 든 스님 한 분께서 괜찮다는 듯 끄덕인다. 동시에 아빠 다리하고 앉은 치마폭으로 무언가 뛰어 들어온다. 내려다보니 고양이 한 마리. 비가 내리기 전에도 사원에 크고 작은 고양이들이 참 많았는데. 거센 빗소리에 고양이도 아늑한 품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기분. 저 멀리서 한 마리가 또 뛰어온다. 그리곤 또 한 마리가. 또 또 한 마리. 치마폭에 네 마리의 고양이가 앉아있는 걸 보곤 투어 관광 온 유럽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웃는다. 그리곤 나와 고양이들의 모습을 사진 찍는다. 다른 나라에 구경 와서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는 참, 재미난 경험.
한 스님이 지나가며 20분이면 멎을 거랬는데 빗줄기가 길다. 1시간은 족히 앉아있던 것 같다. 책을 읽다가, 사원에서 비를 피하는 10대 아이들과 까르르 웃다가. 고양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내 품에서 잔다. 바삐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는 여행과는 다르다. 안 그래도 느리게 가는 시간이 더 느리다.
비가 멎은 후에도 바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품 안에 고양이들을 내려놓기가 어려워서. 역시 험난한 시기엔 누군가와 붙어있어야 하는 건가. 어렵사리 고양이들을 떼어 놓고 다시 호텔로 향했다. 바간으로 향하는 슬리핑 버스를 예약해놓기 때문.
짐을 찾고 호텔리어가 우버로 불러준 택시에 올라탔다. 1시간이 넘는 거리와 교통체증에도 1만 짯에 갈 수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미얀마 사람들로 북적인다. 버스를 기다리며 맥주를 곁들여 간단히 식사를 했다. 노곤 노곤한 것이 졸음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