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가 사라지고, 남은 껍데기를 어떻게 처리해 할까
잘 살펴 가! 우리 나름대로 당신을 잘 추억할 테니 걱정 말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이의 흔적들을 처리하는 건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것으로부터 오는 추억과 그리움, 슬픔은 덤이다. 전혀 반갑지 않은 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물건은 태워 보내 주는 관습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남은 자들이 본인을 위해 의미를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유품을 굳이 굳이 태워 보내지 않고, 생전에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사용했다. 탐이 나서가 아니라 그녀의 취향에 따라 하나하나 고심해서 골랐을 것을 생각하며 잘 사용해주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니의 물건에서는 언니에게서만 나던 향이 깊숙이 배어 있다. 섬유 유연제 냄새도 아니고, 향수 냄새도 아닌 언니만의 냄새였다. 언니는 떠나고 없지만 언니 물건에서 나는 언니 냄새로 언니를 더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었다. 아니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 같다.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고,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적인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언니의 물건들도 나와 함께 이사를 다니고 하며 점점 냄새를 잃어 갔다. 게다가 내 체격은 언니 옷을 입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해졌다. 그렇게 내게 있던 언니 물건은 버릴 수는 없는 짐이 되어 함께하고 있었다.
몇 년간 언니를 추억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 동거 동락하다 문득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다' 싶어서 언니 물건들을 주섬주섬 캐리어에 담았다. 헌 옷 수거함이나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어서 본가에 가져가져 가기로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 본가에 도착해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이러이러해서 이제는 언니한테 보내줘야 할 것 같단 설명과 함께. 원래는 언니에게 보내기 전에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두려 했는데, 정신이 없던 나머지 그냥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하는 메시지를 했다.
'엄마, 언니 꺼 태우기 전에 사진 한 번씩만 찍어놔 줘. 내가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되었다. 그리고는 엄마한테서 사진이 왕창 왔다. 사진 한 장도 겨우 보내는 엄마인데, 나한테 보내주려고 고군분투하신 듯하다. 엄마한테서 온 사진은 언니의 옷을 옷걸이에 정갈하게 걸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찍은 사진들이었다.
하나하나 펼쳐서 옷걸이에 걸며 본인 딸이 생전에 입었을 모습을 떠올리며 사진으로 남겼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슬프다는 말 대신 엄마에게 고생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하나하나 사진 찍느라 고생했네 울 엄마'
내 메시지에 엄마가 답장을 보내왔다.
'이게 뭐가 고생 이대. 언니 마지막 옷 만져보네'
엄마의 답장 한마디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마음을 십 분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난 후회하지 않는다. 언니의 물건을 몇 년간 보관하다 엄마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겨달라고 한 것을.
마음이 아파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꽁꽁 싸매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건 슬프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건 떠난 자가 기억과 마음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모두에겐 단 한 번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그 죽음의 문이 빨리 열린 것이다. 죄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먼저 떠난 이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해줄 수 있는 건 우리가 고인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그가 없는 순가에도 고인을 떠올리며 추억하는 것이다. 만약 고인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런 순가에 이런 리액션을 했겠지, 이런 말을 했을 거야 등 방법은 다양하다. 나처럼 고인의 물건을 오랫동안 간직하다 떠나보낼 준비가 됐을 때 사진으로 남겨서 보내주는 방법도 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다는 어른들의 말은 한치의 틀림이 없었다. 나는 어느 순간 웃고 떠들고 있었고, 보잘것없는 일에도 힘들어하고 슬퍼하고 있다. 고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서운할 일이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언제 슬펐냐는 듯 순수하게 웃는 날이 온다.
언니를 떠나보낸 많은 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얼마나 언니를 추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가족인 나, 엄마, 남동생만큼은 언니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추억하는 우리만의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언니가 없는 순가에도 언니 이야기를 하며, 언니 이야기를 한다. 슬프기도 하고, 웃으면서 눈물이 차오르기도 하지만 고인을 오랫동안 추억하는 우리만의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남들의 방식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고인과 작별을 서서히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라. 슬퍼할 그 시간에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한 번이라도 더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으니 그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전하라.
오늘도 네가 있어 너무 행복하다는 말 한마디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