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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걷기

걸어가 보기로 한 사막 유랑자

by 승진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잘했다.


처음엔 모두가 같은 선에서 시작했지만 가장 먼저 결승선과 몸이 닿는 사람은 나였다. 한 명, 두 명을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면 앞에는 손등에 ‘1등’이라는 도장을 찍어주는 학부모들과 1등을 축하해 주기 위해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1등’이라는 도장이 손등에 찍히기 위해 나는 뛰었다. 눈을 감고 무작정 뛰었다. 달리는 동안 나의 손등에는 수많은 도장이 찍혀 갔다. 수학 내신 1등급, 과학 3개 동시 100점, 전교 4등, 그리고 서울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적지에 도착하자, 나는 멈춰 서서 비로소 눈을 떴다.


그곳은 사막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따위의 이정표는 없었고, 심지어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려주는 발자국도 없었다. 손등에 찍혀 있던 도장들은 달리는 동안 모래바람이 다 쓸고 가서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같이 달리던 사람들, 앞에서 기다려주던 학부모들과 부모님도 사라지고 없었다.


방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고통스러웠고 이 길이 맞나 무서웠고 나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23년 동안 목적지 있는 삶을 눈 감고 뛰어오던 나에게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밖에 없는 사막은 너무나 황량했고 생소했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지금까지 뛰어왔던 길과는 조금은 달랐기에, 사막에서 섣불리 뛰었다가 영원히 길을 잃을까 봐 함부로 시작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다가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비밀의 화원’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러한 가사가 있다.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거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음을. 걱정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음을. 그래서, 이제는 그저 걸어가기로 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걷는 게 나으니깐. 사막에서 가만히 있으면 돌아오는 결과는 모래로 뒤덮인 죽음뿐이지만, 걸어가다 보면 그래도 뭐든 나올 거니깐.


중간에 오아시스가 나오면 잠시 목을 축이고, 모래폭풍이 오면 바위 뒤에 숨어 잠시 폭풍을 피했다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사막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어차피 걸어갈 거라면,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 보리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겁게, 행복하게.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조촐하더라도, 아니 아무것도 없었던 죽음이라도 뭐 어떤가. 즐거웠는데, 행복했는데.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딨나. 그저 시간이 걸릴 뿐“. 이 말을 한 유재석은 2025년 현재 총 20회의 대상을 받은 유일무이한 ‘최고의 MC’지만, 그에게도 10년여의 긴 무명 생활과 그로 인한 카메라 울렁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도 사막 유랑자의 생활은 있었다. 그런 그가 선택했던 것은 ‘마음먹은 대로’만 하자 하고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앞만 보고’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나.


나는, 걸어가 보기로 했다.



‘비록 산의 정상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도전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중도에서 넘어진다 해도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자. 자신에게 내재한 힘을 최대한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 큰 목표를 설정해 놓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L.A.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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