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손님 안 올 거예요."
갑작스러운 도준의 말에 서윤이 놀라 쳐다봤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손님이 안 올 거라니?"
"사실 어제 'M'이 왔었어요."
"M이라면, 도준씨 기억을 지워 준 사람 말이에요?"
"네"
"갑자기 왜요?"
도준은 어젯밤 있었던 일 전부를 털어놨다. 생각이 많아 잠들지 못하고 있던 도준을 찾아온 M, 그런 M이 제안한 일까지. 서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도준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렇다고 기억을 지우는 일이 틀렸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이번에 온 사람이 조금 특별해서 신경이 쓰일 뿐이죠."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서윤의 대답에 도준이 머쓱한 듯 머리를 만졌다.
"그럼 이제 계획이 뭐예요?"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항상 같은 일상을 보내왔다. 매일 아침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읽거나 다른 이의 기억에 들어가 느끼고 구경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맞춰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기억을 모두 지운 손님이 떠나고 남은 영롱한 빛의 구슬을 보며, 뿌듯하게 그날의 하루를 정리했다. 당분간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도준이 이곳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윤의 질문에 도준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계획이 뭐냐고요."
"잘 모르겠어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사라진 거니까."
서윤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금세 결론을 내린 듯 말을 이어갔다.
"M이라는 사람이 휴가 준거잖아요?"
"휴가는 아니죠."
"그럼 뭔데요?"
"그건.."
역시 서윤은 도준의 말을 막히게 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휴가 보낸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봐요. 내가 말했던 것도 한 번 생각해보고."
"말했던 거요?"
"기억을 지워주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거요."
서윤의 말에 도준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실 서윤의 말이 맞았다. 부정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그 남자가 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부정하고는 있지만, 도준 스스로도 이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 중이었다. 만약 서윤의 말처럼 자신이 틀린 거라면,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주는 게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더 불행한 일이었다면, 이후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온 일이 맞기를 바라는 것이 더욱 현명할지도 몰랐다. 도준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졌다. 서윤은 그런 도준의 낌새를 바로 눈치챘다.
"그럼 이건 어때요? 지금까지 기억을 지워준 사람 중에 몇 명을 찾아가 보는 거예요."
"그 기억 속으로요?"
"아뇨. 그 사람의 '현재'에."
생각도 못한, 아니 생각한 적이 있더라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을 서윤은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미 기억을 지운 사람을 찾아간다니. 지금껏 기억을 지워준 사람은 마냥 행복하게 '현재'를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불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본인의 선택으로 기억을 지운 사람들이었지만, 도준 자신이 옆에서 부채질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자신 역시 기억을 지우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도준은 서윤의 말에 망설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안함까지 가득했다. 서윤은 무언가 잡았다는 듯, 도준을 자극했다.
"기억을 지워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더니, 자신 없나 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 역시 기억을 지우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근데 왜 망설이는 건데요?"
"그건.. 행복하게 살고 있을게 분명한데,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죠."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도준씨가 기억을 지워준 행동이 옳은 일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잖아요.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솔직히 말해봐요. 그 사람이 기억을 지우기 전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 무서운 거죠?"
"아니라니까요!"
"그럼 같이 가요. 기억을 지워준 사람한테."
"좋아요. 가요! 대신, 내 말이 맞다면, 앞으로 기억을 지워주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돼요. 알겠죠?"
서윤이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좁디좁은 돌담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주의 시골길은 정말이지 좁았다. 조심히 차를 몰고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니 곧 넓은 공간에 웅장하게 서있는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여느 시골 마을에나 있을 법한 큰 나무였다. 도준은 나무 옆 공간에 차를 대고 내려 마을을 둘러봤다. 오래된 시골집 사이로 세련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으로 마감된 세 개의 집. 창문과 문은 원목으로 꾸며져 있어, 더욱 깔끔해 보였다. 집 밖에 꾸며진 작은 정원 때문인지, 집이 더 세련되어 보였다.
"오늘 예약하신 분 맞죠?"
낯선 목소리가 도준을 향해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틀었다.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주에서 남편을 잃고 기억을 지우러 왔던 여자였다.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는 도준을 한 집으로 안내하더니 주의사항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여자의 말투는 사무적이다 못해 기계적이었다. 기억 속 다정하고 따뜻했던 느낌의 여자와는 사뭇 달랐다. 짧은 설명을 마치고 여자는 곧 사라졌다. 그제야 서윤이 도준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 저렇게 차가운 분이었어요?"
"모든 기억을 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기억과는 많이 다르네요."
여자를 보자마자 도준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기억을 지우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여자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적어도 평범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기억을 지운 것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아직 여자의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여자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이왕 주는 거 기억을 보는 능력도 줬으면 좀 좋아."
"네?"
"아니에요. 일단 짐부터 풀어요. 서윤씨 말대로 어떻게 보면 휴가를 즐기고 있는 거니까."
"네. 좋아요."
서윤은 신난다는 듯 웃으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서윤과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같은 집에서 살았다지만, 새로운 공간은 둘에게 어색했다. 욕실과 침실이 완전히 분리된 기억저장소와는 달리 이곳은 욕실과 침실이 붙어있었다. 씻으러 간다는 서윤의 말에 괜히 민망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마을 산책을 하고 오겠다는 이상한 핑계를 대며 도준이 밖으로 나왔다. 공기는 선선했다. 겨울에서 봄이 넘어가는 지금은 도준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편안한 복장으로 조용한 마을을 걷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하늘에 떠있는 별과 종종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분위기를 냈다. 시골집들의 불이 모두 꺼져있어, 가끔 있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어두컴컴한 밤에 혼자 조용한 마을을 산책하다 보니 무서운 느낌까지 들었다. 도준은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괜히 혼잣말을 시작했다.
"여기는 몇 시나 됐다고 이렇게 어두워."
"이곳 어르신들은 9시면 모두 주무시거든요."
"깜짝이야!"
어두운 공간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도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아까 낮에 봤던 기억을 지운 여자가 서있었다.
"괜찮으세요?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너무 놀라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가빠르게 뛰는 심장은 통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도준이 여자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갑자기 말을 건네셔서 너무 놀랐어요."
"산책하고 계셨나 봐요"
"아 이제 돌아가려던.."
말을 하던 도준이 순간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사정을 물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이제 막 산책을 나왔는데, 너무 어두워서 길을 잘 모르겠네요. 괜찮으시면 안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이후 도준과 여자는 말없이 마을을 걸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 적막한 상황.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도준과 달리 여자는 평온해 보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도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곳에 정착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글쎄요. 한 1년 정도."
"서울에서 내려오신 건가요?"
"반은 맞아요. 서울에서 내려오긴 했거든요. 남편과 함께 제주로 내려와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왔어요."
"남편분이랑 같이 운영하고 계신가 봐요."
도준이 모른 척 물었다. 아픈 기억이겠지만, 도준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도준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죽었어요. 아니, 죽었대요."
"그게 무슨.."
"남편이랑 저는 바다를 좋아했어요. 특히나 제주바다를 좋아했는데, 이곳에 올 때면 언젠가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하며 살자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남편과 함께 제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했어요. 근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배 사고로 죽었다네요. 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왜 기억이 안나시는건가요."
"병원에서는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이라고 하더라고요. 남편과의 기억은 모두 나는데, 딱 그곳에서 함께 지낼 때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남편의 죽음이 있는 기억이 스트레스가 됐을 거라고 하네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여자 본인이 원해 기억을 지우러 왔고, 기억을 지워줬다. 재차 되물었고, 여자 역시 굳게 다짐하고 기억을 지웠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참의 적막이 이어졌다. 고요 속에 둘의 맞지 않는 걸음 소리만이 골목에 울렸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신 건가요?"
도준이 어렵게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으니, 바다를 보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주 마을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온 거죠 뭐."
여자의 말처럼 이곳은 바다와 꽤 거리가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바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는 이곳이 여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 아닌가요? 그 기억이 안 난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도준이 작정한 듯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여자가 놀란 듯 도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며 걸어갔다. 그 옆을 도준이 따라갔다.
"글쎄요. 전 오히려 반대더라고요. 슬퍼하고 싶은데, 슬퍼할 수 없다는 게 오히려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남편이 죽었다던 바다를 보며 울고 싶고, 남편이란 함께했던 그곳에서의 추억에 파묻혀 그리워하고 싶어요. 남편이 어떻게 죽었고, 그때 저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기억하고 싶어요. 물론 많이 슬프겠죠. 하지만 그런 작은 기억들 하나하나가 제게는 너무 소중하거든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억으로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마음껏 슬퍼하고 다시 바다가 보이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신이 그때 일이 너무 힘들어 직접 기억을 지운 거고, 다시 그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어요?"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침묵은 꽤 오래 이어졌다.
"네. 후회하더라도 기억을 찾고 싶네요. 저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슬프거든요."
고요한 둘 사이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