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훈 Apr 29. 2022

[기억저장소] #8. 고민

 푹푹 찌는 한낮의 더위와 달리 저녁 공기는 선선했다. 근처에서 예초라도 했는지, 잘린 풀냄새가 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넘어왔다. 도준은 넘어온 풀냄새를 맡으며 툇마루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낮에 있던 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한 사람, 그것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딸의 기억을 통으로 지우는 사람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남자가 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기억을 지워줬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저녁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떠있었다.

"잠이 안 오나 봐?"

인기척 없이 들려온 말소리에 도준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소리가 난 곳에는 M이 서있었다. 자신에게 이곳을 맡긴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도준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M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래. 못 볼 사람 본 것처럼."

M이 웃으며 말하자, 도준이 그제야 대답했다.

"인기척도 없이, 그것도 몇 년 만에 나타난 사람인데 당연히 놀라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M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도준 옆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M 때문에 복잡하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왜 난 오면 안 되나? 여기 내 집이야. 너는 그냥 전세 들어온 사람이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온 적 없었잖아요. 정작 필요할 때는 안 오더니 지금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저녁에 찾아오니까 그렇죠."

"글쎄. 내가 보기엔 어느 때보다 내가 필요한 것 같은데?"

M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도준이 현재 고민하는 바를 이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다. 도준의 말문이 막다.

"잠깐 걸을까?"


 골목을 나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어색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 M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그 뒤를 도준이 따랐다. 곧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도준과 M이 처음 만난 곳이었다. 자리는 그대로였다. 낡은 의자와 의자를 비추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M이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도준 역시 M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오네."

"그렇네요."

"밖에는 잘 안 나오는 것 같던데. 지운 기억 때문이야?"

"아무래도 밖에 나오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까 봐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을 찾을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물론 도준도 알고 있었다. 기억저장소에서 지운 기억은 다시 구슬을 보기 전까지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조심, 또 조심했다. 기억은 잊혀졌지만, 그 기억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도준은 알고 있었.

"잠들지 못하는 건 오늘 낮에 온 남자 때문인가?"

M이 본론을 꺼냈다. 역시 M은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알고 계셨네요."

"당연하지. 내가 보낸 남자인데."

문득 남자가 들고 있던 편지가 생각났다. 편지에는 M의 도장이 확실히 찍혀있었다. 기억저장소에 오는 손님을 M이 보낸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도준이 뒤늦게 흥분한 목소리로 M에게 물었다.

"그 남자 대체 왜 보낸 거예요? 아무리 기억을 지운다고 하지만, 한 사람의 기억 전부를 지우는 건 너무 하잖아요. 그것도 자기 딸의 기억을."

"똑같이 잊고 싶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기억을 지워줬어. 문제 있나?"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겠죠. 하지만 한 사람의 기억 전부를 지운 거잖아요. 일부분만 지워줘도 됐을 문제 아닌가요?"

도준은 어느새 기억을 지우 말았어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지울 수 있다면 기억을 지우는 게 맞다고 말하던 예전 도준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M은 도준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들으면서도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M은 한껏 쏟아낸 도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후에 말을 이어갔다.

"네가 지운 기억도 그랬어."

"네?"

"네가 지운 기억도 그랬다고. 한 사람에 대한 기억 전부를 지웠다고. 물론 네가 원해서. 기억 안 나겠지만 말이야."

예상치 못한 M의 말에 도준이 벙쪄 입을 다물었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내가 왜 그랬을까' '무슨 내용이었이길래, 모든 기억을 지운 걸까.' 기억을 지운 남자를 의아하게 여긴 도준이었지만, 그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궁금해?"

"네?"

"궁금하냐고. 네가 지운 기억."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궁금했다. 어떤 기억이었길래, 남자와 같은 선택을 한 건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만큼 힘든 기억이었을게 분명하니까. 시 기억을 돌려받는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고민하지 마. 네 기억을 돌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약속은 약속이잖아?"

M이 도준을 보며 얄밉게 웃었다.

"아직도 잊고 싶은 기억이라면 잊어도 된다고 생각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던 그때와는 달리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M을 처음 만난 그때의 도준과 지금의 도준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원한다면 당분간 손님을 안 보낼 수는 있어."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야. 당분간 손님을 안 보내겠다고. 보아하니 네 확고한 생각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당분간 쉬면서 생각을 좀 해보라고."

이번에도 도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도준을 뒤로하고 M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럼 또 보자고."

"가시는 건가요? 또 언제 오시죠?"

"글쎄. 내가 필요할 때?"

M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점차 멀어지던 M의 모습이 순간 먼지처럼 사라졌다. M이 떠난 거리가 아까보다도 더 고요해졌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 로등 불빛만이 도준을 비췄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저장소] #7. 남자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