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낡은 도마
공방의 교육과정에도 없는 도마를 처음 만들게 된 계기는 집에 있는 낡은 도마 때문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촘촘히 박힌 칼날 자국이 못내 안쓰러워 바꿔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공방으로 향했다.
"도마 만들 수 있을까요?"
내 말을 듣자마자 선생님은 이내 공방 한편에 쌓아둔 원목 창고로 나를 데려갔다. 내 몸집보다도 훨씬 큰 원목이 가득 쌓여있는 곳. 이윽고 적당한 나무가 내 손에 들어왔다. 월넛(호두나무)이었다.
적당한 사이즈. 무거운 느낌의 진한 색 사이로 가늘게 나있는 연한 색의 결까지. 더없이 완벽한 재료였다.
가장 중요한 스케치
공방 한편에 자리를 잡고는 나무 위에 이리저리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실수 없이 나무를 자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스케치였다. 성에 차지 않아 지우고 그리기를 수십 번. 이내 그럴듯한 스케치가 그려져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다른 이들도 예쁘다고 말해주니, 괜스레 뿌듯해져 왔다.
밑그림대로 나무를 잘라본다
스케치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었다. 자칫 조금만 선을 넘어간다면, 기존에 생각했던 디자인과 다른 도마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기존에도 써본 장비지만,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에 남아있는 각재로 몇 번 연습을 해보고는 이내 도마를 가져왔다. 날카롭게 돌아가는 톱날을 따라 조심스레 나무를 밀어낸다. 나도 모르게 숨이 참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실수 없이 나무를 잘라냈다. 참았던 깊은숨이 나왔다.
모양을 다듬어주는 트리머 작업
우리가 흔히 시중에서 보는 도마는 모서리가 둥글다. 물론 원목 그대로의 각져있는 도마도 많지만, 대부분은 둥글둥글 자신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트리머로 작업할 수 있었다. 자칫 날카롭게 느껴지는 도마의 모서리를 트리머로 다듬어 주어야 비로소 내가 원했던 도마가 나올 수 있었다.
처음 트리머를 켜고 들었던 그 날카롭고 큰 소리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굉장한 소음과 함께 느껴지는 진동. 천천히 도마로 가져갔지만, 작업은 되도록 빨리 끝내야 했다. 트리머 자체가 고속 회전하는 베어링을 통해 나무를 다듬는 과정이었으므로, 천천히 작업하다 보면 나무가 그을려 검게 변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물론 사포로 열심히 닦아내면 될 일이었지만, 이 사포질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조금 후의 작업을 조금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과감히 작업에 들어갔다. 나무 몇 부분이 검게 그을렸지만, 이 정도면 사포질이 많이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름 정도는 새겨야지
사포질을 끝내고 매끈해진 도마 위에 내 이니셜을 새겨 넣는다. 처음 만드는 도마에 꽤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으니, 이번만큼은 꼭 새겨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조금은 연한 나무색. 하지만, 각인이 끝나고 오일을 골고루 펴 발라준다면, 그제야 월넛만의 진한 색이 뿜어져 나올 것이다. 나무 먼지 가득한 공방에서 커피 한 잔 하니, 이내 각인이 완성되어있었다.
스툴과 도마
나무가 월넛 본연의 색을 나타내니 더없이 예뻤다. 월넛만의 고급스러운 색이 진하게 배어 나와 멋스러움을 한껏 더했다. 그뿐인가. 처음에 원목을 가지고 올 때 있던 연한 색의 결도 자기만의 색을 나타내며, 도마의 한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지금껏 만들어왔던 도마들
참 많은 도마를 만들었다. 내 지인들의 선물로도 꽤나 많은 도마를 만들었고, 클래스 강사로 일하며 여러 가지 도마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고양이 모양, 사슴뿔 같은 모양의 독특한 도마가 있었던 반면, 무난하고 심플한 같은 디자인의 도마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같은 도마는 없었다. 아무리 같은 디자인으로 나온 도마라고 해도, 나무 자체의 결이 달랐다. 어떤 나무는 한쪽에 옅은 결이 있는 반면, 어느 나무는 양쪽에 진한 결이 있었다.
"이 나무는 이쪽 결이 예쁘니, 이 부분을 살려 밑그림을 그리면 예쁠 것 같아요."
도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결이 처음 보면 자칫 지저분해 보이고, 잘라내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밑그림대로 나무를 잘라 다듬고, 오일을 발라 도마를 완성하면 곧 잘라내지 않은 결에서 나오는 특유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같은 디자인의 도마임에도 자신의 도마를 용케 찾아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생각은 곧 확신이 된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나무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우리도 우리 자신만의 결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가진 결을 잘라내기보다는, 그것으로 보다 매력적인 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내가 가진 결을 스스로 잘라내지 않도록 노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