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결단
미국에 와 쭉 한 곳에서 거의 10년을 같이 살다가 내가 떠나야 하는 5달 전에
대학 옆으로 이사를 하고 아이들 둘이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정리 정돈을 했었다.
처음으로 내가 없어 아이들의 입장에서 쓰게 될 물건들을 눈에 뜨이게 넣어 두고
혹시나 뭔가를 찾으면 알려 주려고 사진도 찍어 두었었다.
동부에서 아들의 졸업식을 마치고 기숙사의 짐을 끌고 LA의 집에 왔는데
대학 옆으로 이사 온 지 6년 만에 처음 열어 보게 된 상자들이 있었다.
내가 이런 곳에 넣어 두었었구나 하며 내 기억력을 의심해야 하는 상자들이...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당연히 그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딱히 알았더라도 쓰지 않았을 것 같은 물건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기숙사에서 살던 아이가 돌아오면서 버리고 추려서 가지고 온 짐들은
집안에 있던 것을 싸서 보냈던 것 같은데 있던 자리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겨울이 있는 곳에서 지냈던 탓에 겨울옷이 몇 개 늘어난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달라져 넣어야 할 공간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참에 뭔가를 단호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물건이 이렇게 많다니...
처음 미국에 오면서 가지고 온 것들이 아직도 집안 곳곳에 남아 있다.
아이들의 어릴 적 추억이 담겨 있다며 아끼면서 쓰지 않았던 것도 있고
이제 나이가 맞지 않아서 절대로 다시는 쓰지 않게 되어 버린 것도 있으며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어디서도 찾기가 힘들어진 카세트테이프 같은 것들도 있었다.
나도 많이 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잘 보살피며 편하게 부족함이 없이 도와주는 것을 전부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속에 내가 있고 내가 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물건을 보는 시선도 달라져
무조건 어릴 적의 추억이 되는 물건이라며 놔뒀던 것들에
의미를 다시 찾으며 보관해도 그대로 그 의미가 남아 있을 건지를 따질 줄 알게 되었다.
사실 미국에 와 처음 1년을 지내면서 다음 1년을 지낼 수 있을까 했다.
만약 떠나게 된다면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이 한 장도 추억거리였는데
그런 시간이 16년이 되어가니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했다.
돈 많은 엄마가 물려준 것들은 다 비싼 것인데 절대로 내가 사는 일은 없다며 잘 모셔 두었었다.
그 비싼 것들은 처음부터 키가 더 큰 나의 몸에 맞지 않았지만 내 딸은 쓸 수 있겠지 하면서
잘 간직했다가 미국까지 가져왔는데 나보다 더 커진 딸에게 맞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언제 이런 것들을 가져 보겠냐며 그저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했는데
그런 것이 이젠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닭게 되었다.
버린다.
멀쩡한 것들은 기부를 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것들은 분리수거에
흔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 통으로...
3년 전에 버린다고 했던 컴퓨터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록을 지우라고 아들을 닦달하고
바쁘다는 딸을 앉혀놓고 치수가 맞는지 쓸 마음이 있는지 등을 결정하라고 했다.
날씬해지면.. 하면서 놔둔 내 옷들에 미련을 두고 머뭇거리니
딸이 나중에 날씬해져도 이 옷 스타일은 이미 지나갔다며 종지부를 찍었다.
집안에 쌓아둔 빈 상자들도
처음 1년간 혹시 고장이 나면 반품한다면서 놔둔 것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벌써 고장이 나서 물건은 없는데 상자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들도 있었다.
거의 한 달을 이렇게 열어보고 생각하고 추리고 결정하면서 보냈다.
기부하는 곳에 몇 번씩 들락거리고
기부하긴 그렇지만 아직 쓸 수 있는 것은 설명서를 붙여서 재활용에 내놓았다.
이러면서 나는 물건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다시 느낀다.
있으면 좋겠지만 있어서 짐도 된다는 것을...
이 작은 집안이 이제야 숨을 쉬는 것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