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체면
일본에서 집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갑자기 넘어질 것 같이 균형을 잃었는데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 꼴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체면을 살리고자 한쪽 발에 체중을 실어 넘어지는 것은 겨우 면했지만
발의 바깥쪽이 심하게 바닥에 닿았다는 것을 느끼니 곧 아파왔다.
그래도 1주일에 한번 먹을 것을 사러 나가는 일을 관둘 수 없어 그냥 버스를 탔었다.
버스에서 내려 마켓으로 걷는데 발이 부어 신발에 눌린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집안에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찬찬히 모두 사서 배달을 부탁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발은 계속 부어 커지는 것 같았는데
내 체중을 모두 받았으니 붓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식품을 샀으니 그동안 조용히 지내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풍선처럼 부었던 발등이 조금 가라앉으니
퍼렇고 검붉은 색의 멍이 발등을 덮고 발바닥까지 나타났다.
그래도 발가락이 아프지 않게 움직이고 발목도 멀쩡해서
아마도 피부에 나타난 현상은 근육 탓인가 했었다.
타국에 살면서 난 병원에 안 가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왜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긴지..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면 전부 감기에 걸린 아이들이 기다리며 콜록거리는데
그 속에서 그저 참을 만한 수준의 감기가 완전한 감기로 만들어질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의료 보험이 없어서 무척 비쌌다.
해서 웬만한 것에 병원을 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서 귀 아프게 들었다.
아들이 39도를 넘나들 때에도 난 병원에 가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열을 잘 냈던 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집에서 다스렸는데
그때 아이에게 먹인 해열제와 체온을 적어 놓은 기록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난 뭐든 내가 가진 상식 안에서 병을 크게 부풀이지 않고 조용하게 끝냈는데
이번에도 부기가 빠지고 멍든 것이 가라앉으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생각보다 흉측하게 보이는 것은 나이 탓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치고 열흘 후에 부모님과 약속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부은 것이 거의 빠져서 운동화를 신을 수 있다는 것에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커멓게 통통해진 발을 보면서 아버지가 사진을 한 번은 찍어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는데
노년의 충고보다 젊은 동생이 사진을 찍어 보라며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기 전날에 인터넷에 평판이 좋은 정형외과를 찾아갔는데
이대로 내 생각대로 있으면 나을 거라는 내 판단의 확신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의사가 사진을 보고 뼈에 금이 갔다며 이 금이 처음보다 더 벌어진 건지 확인이 안 된다며
왜 다치고 바로 병원에 가지 않았냐며 한소리를 하는데...
보통은 6주면 뼈가 붙는다고 하는데 난 계속 발을 디뎌서 썼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이대로 더 벌어지지만 않는다면 뼈는 붙을 거라며 무조건 쓰지 말라고.
그날 난 반 깁스와 목발을 짚고 소염제 주사를 맞고 약을 타서 병원을 나오는데
내 모습에 내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사실 난 전혀 아프지 않아서 부모님의 일을 대신하면서는 달린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을 나와서 처음 하는 목발이 서툴러 넘어질 뻔 하니 나도 모르게 나는 목발을 들고 걸었는데
그런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난 사기를 치는 것 같아 엄청 미안했다.
그러면서 더 벌어지면 안 된다고 했던 협박에 목발은 짚으면서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친구가 내 꼴을 보고 일본으로 가 짐을 풀고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은 더 힘들 것 같다며
여기서 계속 지내다가 바로 미국으로 가면 어떠냐고 한다.
열흘 후에는 미국 LA에서 하루를 쉬고 딸과 같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들의 졸업식에 가야 한다.
친구의 말대로 일정을 바꿔 보려고 석 달 전에 미리 사둔 비행기 일정을 물어보니
내가 산 티켓이 가장 싼 것이어서 미국행은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대로 버리고 다시 사려면 내가 산 금액의 4배를 지불해야 한다면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미국으로 가는 날짜로 바꾸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했다.
아침 일찍 오사카로 가서 거기서 약 두 시간 후에 인천행으로 환승하는 것인데
미국행 비행기표는 그대로 오사카에서 타야 추가 요금이 없다고 했다.
일정을 이렇게 바꿔놓고 열흘 동안 두 번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한 번은 시키는 데로 깁스와 목발을 열심히 짚고 있다가 찍고
한 번을 조금 가볍게 실내에서는 깁스 없이 지내는 얌체짓을 하다가 찍었는데
두 번 다 더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해서 대강 어떻게 지내면 되는 지를 알아냈다.
두 개의 목발을 한 개의 목발로 줄이고 비상용으로 소염제를 많이 받아 왔다.
가방엔 일본에서 내가 쓰려고 산 물건들이 가득한데...
한 열흘 한국에 있다가 돌아올 거라고 일본 공항버스표도 왕복으로 샀고
습기가 많은 일본이어서 길게 집을 비울 때엔 모든 것을 바람이 통하도록 해야 하는데
내 방의 침대에는 이불이 그대로 깔려 있으니..
이번엔 뭐든 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김해 공항에서 3장의 비행기 티켓을 받아 들고 오사카로 갔는데
간사이 공항에서는 환승을 하지 않는지 환승객은 나 혼자였고
환승 수속하는 장소가 입국 수속하는 곳에 있어서 한참을 걸어야 했었다.
인천에 내려서는 환승 해야 하는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어서 휠체어를 탔는데...
아파서 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와 타고 있는 내내 웃음을 참는 대신 씰룩거렸다.
젊은 아가씨가 밀어주는데 엄청 힘들어 보여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 모습이 궁금하고 이 경험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휠체어를 탈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
LA공항에서는 깁스 덕에 입국 심사의 긴 줄에서 예외가 되어 바로바로 해결이 되었다.
휠체어를 탈거냐고 신청하라고 했지만 밀어주는 사람과 소통할 수 없어서 관뒀다.
LA공항에서의 심사는 사람을 심문하듯이 몰아서 언제든 잘못되면 돌아간다는 각오였는데
이번은 무조건 부드럽게 긍정적으로 대해서 많이 혼돈이 되었다.
무엇이 달랐나.. 하고 생각하면 내 발의 깁스가 달라진 건데
그것과 입국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이렇게 심사가 친절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난 필라델피아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덕을 봤는데 딸이 굉장하다고 하더니
두 번 하는 졸업식에서 딸은 당당하게 장애인 자리에 안내해 달라고 했다.
무사히 졸업식이 마치고 딸과 아들은 이곳에만 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녔는데
난 발이 걱정이 되고 아이들의 걸음걸이에 방해도 되어 사다 주는 음식으로 지냈다.
간혹 동부에 와서 이러고 호텔에만 있으면 나중에 후회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목발을 짚고 입학 때 왔던 기억도 떠올리면서 학교 캠퍼스를 산책했었다.
여기까지 온 목적의 다른 하나는 아들의 기숙사 짐을 정리하는 것인데
기숙사의 문을 여는 순간 아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입학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는지 잔소리를 해 가면서
치우며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만 놔두고 거의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짐이 많았다.
LA로 돌아올 때엔 커다란 가방 하나씩을 위탁 수하물로 부탁하고 기내에 두 개씩 들고 타는데
아이들도 손이 모자랄 정도로 들고 있어서 나도 하나를 들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는 깁스를 하건 목발을 짚건 예외는 없었다.
한쪽은 목발을 짚고 한쪽엔 커다란 짐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먼 탑승구까지 걷는데
내 발의 존재는 벌써 잊힌 지 오래였다.
그 순간의 체면치례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뼈에 금이 가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