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깨달음
고베에 와서 6일 만에 다시 부산으로 갈 건데 하는 생각이 정신을 놓게 만들었는지
난 이틀간 늘어져 있으면서 집안에 있는 날짜가 지난 것들까지 모두 꺼내어 먹고
더는 버틸 수 없어 나머지 3일 치의 먹을 것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먹을 것을 사러 나가기 위해 머리를 빗고 눈곱을 떼고 그냥 보습크림만 바르고
옷도 정식으로 챙겨 입기도 귀찮아 집안에서 빈둥거리던 옷에 바람막이 코트만 걸쳤다.
이러고 나가면서 지갑과 에코백과 알레르기 비염을 위한 휴지만 코트의 주머니에 넣고
일본 휴대폰은 쓸 일이 없고 미국 휴대폰은 와이파이가 없어 괜히 무겁게 들고 가지 말자며
정말 가뿐하게 나와서 여독이 조금 빠진 나는 바깥바람을 맞으며 상쾌하구나 했다.
마켓에서 먹을 것을 사면서 3일 치 이상이 되면 곤란하다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골라
적당하게 사 들고 버스를 타려고 정거장에 서서 집에 가서 뭣부터 먹을까 하다가 생각이 났다.
현관 열쇠를 안 들고 나온 것이다.
난 처음부터 고베 집을 사면서 비워두는 시간이 많을 것을 대비했었다.
그래서 외관이나 장소에 집값을 더 지불하지 않고 나중에 산 금액 정도가 회수가 되는
매달 나가는 관리비등은 아이들과 같이 지냈던 일본 생활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비용으로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은 들려야 하는데 그때 드는 숙박비를 합한 금액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음 놓고 비워 둘 수 있도록 복도 쪽으로 창이 없는 집으로 현관은 버튼식 열쇠로 바꿨다.
완벽했는데...
그 버튼식 현관 열쇠로 바꿀 때 현관문의 두께로 가능한 것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버튼이 있으면서 밑에 열쇠 구멍이 있어서 숫자가 기억나지 않으면 열쇠로 열 수 있어
잠시 들렸다가 다시 떠나는 생활에 번호를 외우는 노력보다는 그냥 열쇠를 들고 다녔었다.
그래서 더더욱 번호는 가물거렸는데 난 그 번호를 미국 휴대폰에 저장을 해 두었고
그래서 언제나 들고 다니는 휴대폰에 번호가 있다는 것에 안심을 했었다.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 들고 집 앞 현관에 선 것이 1시 조금 넘어서 인데
생각 나는 숫자를 돌려가면서 거의 한 시간을 눌러봐도 꼼짝을 안 했다.
이것도 5번을 연달아 틀리면 조금 쉬어야 하는데 그 쉬는 동안 머릿속도 멈춰서
종이에 써 가면서 하는 것도 아니니 이대로 이렇게 시간만 보내면 안 되겠다고
2시가 넘어 1층 아파트 현관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한 번만 쓰게 해 달라고
젊은 두 여자와 중년의 여자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러는 사이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이 일본인들은 휴대폰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는데...
누굴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없어서 그러는지
그저 도와주고 싶어도 번호가 알려질까 봐 그러는 건지 몰라도
부탁하는 나를 일단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 말을 섞기도 겁을 내는지 말도 없는데
그럼 처음부터 설명을 듣지나 말던지 실컷 듣고는 휴대폰이 없다고 하며 떠났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내가 휴대폰이 없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얼른 도와줬었는데...
3시쯤에 이러고 서성이고 있는 것을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또 설명을 하고 아파트 관리 회사에 전화를 하면 사람이 오니까 전화가 필요하다고
그랬더니 할머니는 휴대폰이 없다고 해 그럼 집에 전화는 있냐고 하니 답을 안 했다.
내 표정이 암담해지니 그때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번호가 어디에 있냐고...
이 황당함에도 일본인은 이랬었지 하며 어쨌든 이 기회는 놓칠 수는 없다고
1층 아파트 현관의 관리실 문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통화를 했는데
열 수 있는 사람과 연락이 되면 다시 전화를 해 주겠다고 하기에 내 전화가 아니라고
그냥 기다리겠다고 하니 꼭 전화를 다시 해서 시간 약속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시간 약속인지... 난 들어갈 수 없어서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하는 수 없이 할머니에게 다시 전화가 올 거니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변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왜 자기 전화번호를 아느냐고 야단이었다.
집이 몇 호인지 문밖에서 기다릴 테니 전화가 오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왜 호실을 묻느냐고 불안해해서 내가 몇 호에 사는지부터 이야기를 하니
같은 층이라면서 그제야 자주 집을 비우는 사람이냐고 편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휴대폰 빌려 쓰는 일을 마치고 또 한 시간 가량 기다렸는데
1층 아파트 현관에 붙여 있는 모든 안내서나 설명서를 다 읽어 치우고도 시간이 남았었다.
점점 추워지고 배도 고프고 허탈한데도 난 내가 원망스럽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예전 같으면 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짜증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을 텐데
이 나이에 이런 일을 겪는구나 하는 정도로 덤덤했으니...
4시가 되어 여러 가지 장비를 들고 사람이 왔고
단 5분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렌즈 구멍으로 도구를 넣어 문을 열었다.
그 충격에 이렇게 간단하게 열리냐고 했더니 안 열리는 문은 없다고 했다.
복도 쪽으로 창도 없고 현관의 열쇠는 67000엔이나 들여 바꿔서
나는 이 완벽함에 엄청 안심을 했었는데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휴대폰은 당장 쓸 수 없어도 항상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