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데뷔

중년의 수난

by seungmom

완전한 병원 데뷔를 한 것 같다.


새벽에 20년 전에 했던 이빨이 이를 닦는데 부러져 떨어졌다.

그것도 1주일 후면 미국에 갈 거라고 거의 다 준비까지 마쳤는데...


20년 전에 신경을 뽑았던 것이라 통증은 없지만

이대로 미국에 갈 수는 없다고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니 다 고치고 오라고 했다.


겨우 3시간 눈을 붙였다가 뜨고는 다시 걱정을 시작했다.

사실 뭘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게 마구잡이로 걱정만 늘려가면서

한국의 치과 의사에게 보낸 메시지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8시까지는 내놓아야 하는 쓰레기 버리는 시간이 답장보다 먼저 와서

어쩔 수 없이 멀쩡한 야채들과 반찬을 모두 챙겨서 버렸다.

그래도 오늘이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어서 다행이라며...


아침 9시가 넘으니 의사의 연락이 왔다.

상황 설명만으로는 확실하게 말을 할 수 없으나 2주면 충분하다는 말에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고 미국행은 의사의 소견을 듣고 정하자고 미뤘다.

머물 곳을 찾아내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이번엔 제대로 마음에 들 건지

아는 곳은 모두 빈방이 없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곳에 예약을 했다.


11시가 되어 여기까지 하고 나니 내 기분은 지구를 구한 것 같은데

조금 안심이 되니 긴장이 풀리는지 머리가 멍해지는 게 행동이 느려졌다.

적어도 3시면 집을 나서야 하니까 가방을 꾸려야 한다고 인삼액을 마셔가면서

새벽에는 3개월 전에 사놓은 미국행 티켓을 그대로 쓰자는 생각으로

한국에 가면서 미국행 가방을 모두 들고 가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 일본에 와서 이틀 후에 떠나는 것으로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들은 내가 이렇게 앞뒤 안 맞게 서두르는 것에 숨을 쉬도록 만들어 줬는데

아들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그것부터 하라는 말에 숨통이 트여

다른 것은 뒤로 미루고 우선 이빨 공사를 하러 가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미국행 비행기 좌석인데 복도 쪽으로 자리가 남아 있을지

이렇게 늦게 좌석 배정을 하면 가운데 끼어 앉아서 11시간 이상을 버텨야 하는데

애써 미리 지정해 놓은 좌석을 버리려니 억울했다.


생각이 몸을 끌고 다니면서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머리가 반은 잠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도 이빨만은 당장 치료해야 한다고

효율성과는 상관없이 움직여 집안도 치우고 나니 1시 반이 되었다.

이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배는 안고픈데 잠만은 쏟아져

이러다가 헛발을 디뎌서 저번처럼 넘어지면 곤란하다는 이유를 만들어

한 시간 알람을 해 놓고 앉아 눈을 감으니 바로 잠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인간의 위기 본능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딱 10분 전에 눈을 떴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비행기에서도 다시 공항버스에서도 잠과 싸웠는데

비행기의 사람들이 다들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도 난 자고 있었다.


저녁 10시에 호텔에 와서 가방을 놓고 오랜만에 시래기 해장국으로 배를 채우고

마음에 들지 않는 방에 앉아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하려고 이런 방에 와야 했는지

생각을 더듬으면서 치과에 가까이 왔다는 것에 안심을 했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한 번도 안 깨고 아침 9시까지 잤다.


다행히 인프란트를 안 하고 기둥을 박아서 할 수 있다는 말에 모든 것이 편해졌는데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 이것이었는지 다른 어느 것도 문젯거리가 되질 않았다.

기분 좋게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날짜 변경비를 지불하고 얼른 좌석 배정을 하는데

비행기 좌석이 정말 운 좋게 딱 하나 복도 쪽의 좌석이 남아 있었다.


마음이 널널해져 무릎이 간혹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이참에 보러 갈까 하니

아프지도 않은 것으로 이렇게 선뜻 병원에 가려는 내가 나 아닌 것 같았다.


작년에 발을 다쳐 한번 길을 트고 나니 자꾸 병원을 들랑거린다.

이 나이가 되면 고장이 나거나 낡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뭐든 병의 이름으로 들으면 초기라고 해도 머릿속은 바로 큰 병으로 느껴서 거북한데

그런 걸 알면서도 병원을 찾고 있으니...


진짜 병원 데뷔를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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