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듣고 싶었던 말
딸아이는 연구실에서 곱게 자란티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며
자신은 그렇게 곱게 자란 것 같지가 않은데 그렇게 보이나 하기에
나도 그렇게 곱게 잘 키운 것 같지 않아서 어떤 면에서 그럴까 하며
그땐 내가 키운 것보단 네가 스스로 잘 큰 것 같다고 했다.
딸아이에게 잘 자랐구나 하는 말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
최근에는 이렇게 잘 키워준 엄마에게 고맙다며
문자까지 보냈다고 나에게 보여주는데 정말 신기했다.
같이 근무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에 이런 문자까지 보내게 되었을까
문자까지 쓰고 싶을 만큼의 뭔가를 딸아이에게서 봤다는 것인데
그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이 궁금했다.
딸아이 덕분에 나까지 칭찬을 받는 것 같아서 딸아이에게
네가 스스로를 잘 다스려서 그렇게 보인 것이라며
네가 잘 커 줘서 내가 이런 말도 듣는다고 고맙다고 했다.
나는 전부터 곱게 자란 티가 나는 그런 친구가 부러웠다.
절대로 나에게는 없는 그런 것이어서 그런지 무척 동경했는데
고상한 손길이나 행동 말투부터 나는 근본적으로 달랐었다.
왜 그랬는지 내가 자라는 동안 우리 집은 정말 부유했었고
난 하나뿐인 딸이었으며 그럭저럭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난 그렇게 곱게 자란 티가 없었는지...
곱게 키워진다는 것은 잘 입고 잘 먹는 것이 아니고
부모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는 것 같았다.
그냥 봐도 느껴지는 절대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은 친구는
태도며 말투며 가진 것까지 모든 것에서 부모의 사랑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부러웠는지 난 그 부모님을 보려고 자주 들렸고
그래서 가깝게 지냈었는데 그 친구를 보는 그 엄마의 눈빛은
언제나 넘쳐나게 깊고 촉촉해서 그래서 지금도 기억을 한다.
난 내가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엄마의 눈빛을 많이 떠올렸다.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힘들 때마다 생각했는데
그 넘쳐나는 눈길을 주면서도 항상 아쉽다고 하셨던 말을 들으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에는 작은 분노가 있었다.
엄마들의 눈빛으로 아이들은 곱게 자라는 것 같았다.
대학 때 학기가 시작해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엄청나게 많은 부모님들이 따라와서 생이별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따라온 사람이 없어 벌써 자리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는데
친구의 부모님도 친구에게 섭섭한 눈빛으로 계속 붙들고 말을 했다.
그게 부러워서 나도 내 부모님께 한번 말한 적이 있었는데
한심하다는 듯이 뭘 하러 거기까지 가냐며 또 올 건데 하셨다.
절대적인 인정과 보호를 받으면서 그걸 당연하게 말했던 친구들
이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들에 비하면 난 거의 막 자란 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그래도 대외적인 체면에서 난 잘 포장이 되어 살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너는 다들 부러워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엄마는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도 허접해지는 것은 막으려고
입는 것이나 행동에 주의를 주며 어느 정도는 강요를 했었다.
엄마가 예약해 둔 곳에 가서 구두를 사 신으라고 하기에 갔더니
학생이 사기에는 이곳은 너무 비싸다면서 다시 문을 열어줘서
엄마에게 그렇게 전했더니 뭘 입고 갔었냐고 도리어 화를 냈었다.
내가 입고 다니는 꼴이 한심해서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인데
난 입은 옷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했다.
난 이 무렵부터 곱게 자란티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가식으로 나에게는 감옥 같아서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다들 부럽다고 하는 부분들을 모두 벗어던졌던 것 같다.
자유를 얻으면서 나는 나에게 스스로 곱게 자란티가 나도록 해 보자고
곱게 자란 티라는 것은 모습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가능하다고
이제까지의 생각과는 다른 곱게 자란티라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난 내 딸이 곱게 자란 티가 나는 아이이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엄마로서 내 딸이 곱게 자랐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많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