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평이 조금 넘는 오피스텔에서
아들이 석사를 마치고 3년간을 대학원에 갈 거라고 원서를 쓰면서
합격이 되면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정식 직원이 아닌 상태로 있었다.
OPT는 F1 비자로 미국에서 졸업을 하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데
과학계열이나 수학 등의 전공에는 연장이 가능해서 3년이 주어진다.
아들은 이 OPT로 3년간 학부의 모교 UCLA 연구실에 다니면서 원서를 냈는데
3년째도 마음에 드는 곳에서 연락이 없어 미국을 떠나야 하게 되었다.
그게 19년 8월 중순으로 불체자가 되면 안 된다고 날짜 계산을 철저히 해서
15년 만에 미국을 떠나는 아들을 데리고 부산의 오피스텔로 왔다.
다 커서 한국 부산에 오게 된 아들은 계속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미래가 불투명해서 그런지 한국의 더위를 처음 경험해서 그런지 불쌍해 보였다.
방이 3개나 되는 일본의 집으로 가면 편하게 있을 수 있지만
일본의 영주권이 없어져 그걸 다시 회복시키려면 엄청 복잡해 어쩌고 싶으냐고 하니
다시 미국으로 갈 거니까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일본의 영주권은 필요 없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지내고 싶다고 해서 당분간이니까 방 두 칸의 아파트를 빌려 살자고 했다.
8월 말에 땀을 닦아 가면서 아파트를 보러 다녔는데 서너 군데를 본 아들이
깨끗하게 다 수리가 된 실평이 9평이 조금 넘는 이 오피스텔이 좋다고 그냥 살자고 했다.
미국에서 아들과 내가 응접실에서 같이 지냈던 실력으로 지내면 되지 않겠냐고 해서
정말 같은 방식으로 침대는 아들이 쓰고 난 소파를 장만해 침대로 쓰기로 했다.
아직 공부를 멀리하면 안 되어 아들이 쓸 책상도 주문했는데
실평 9평이 넘는다는 크기가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 소파를 놓고도 넉넉해 보였다.
이러고 19년 말에 코로나가 터지고 23년 코로나로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과 나는 갑갑하다는 생각 없이 잘 살아 냈다.
이렇게 꼭 부산에서 4년을 보내고 대학원이 결정이 되어 떠났는데
그 사이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어떻게 그 좁은 공간에서 덩치 큰 아들과 사냐고
나이가 30이 넘었는데 아직도 원서를 내고 있냐고 걱정들을 했었다.
사실 나도 내가 가라앉을 때엔
이 아들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내 탓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들이 일 년만 더 원서를 써 보고 싶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고
성격상 자기 스타일이 연구실 체질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길로 가고 싶다는데
그러면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정말 먹고만 살고 있는 아이를 꺾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박사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15년 만에 한국에 온 아들이 조국을 만끽하는 모습이 좋았었다.
처음엔 한국말이 서툴러서 좀처럼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2년이 지나니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과잉 설명을 해 주었다.
좋아하는 부산 사투리도 배우면서 한국인의 정을 느껴가면서 지내니
서류만 한국인이었던 아들이 진짜 한국인이 되어 난 그것만으로 충분했는데
아들의 보는 시선이나 관심이 나와 달라 그런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니
타성에 젖어 버린 생활에 활력이 되어 신선한 부산살이가 된 것이다.
정말 아들 덕분에 여러 방면으로 잘 지냈던 것 같다.
친구가 걱정을 할 때도 언제 이런 다 큰 자식과 같이 살아 볼 거냐고
아들이 느슨해지면 이렇게 길게 쉴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을 거라고
긴 인생에서 이렇게 날날 하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겠냐며
합격 통지서만 날아오면 바로 바빠지니까 지금 즐기자고 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같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지루하거나 짜증 안 내고 잘 살아 낸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냐고
4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좋았다는 것이라고
지금 이렇게 쓰면서 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