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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기회를 제공한다

by 황승욱

저는 다섯 살 때부터 혼자 라면을 끓여 먹기 시작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가족들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니 제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논밭에 일 하러 나가시고, 어머니는 공장으로 일하러 다니셨습니다. 5살 많은 누나는 국민학교(제가 다닐 때는 초등학교 ㅎㅎ)가 끝나야 돌아왔습니다. 혼자서 점심 한 끼 정도는 차려먹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5살 아이가 혼자 집에서 밥 차려 먹는 모습은 꽤나 서글픈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제 아들이 혼자 집에 남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혼자 밥을 차려먹은 덕에 저의 생존 스킬은 일찍 향상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밥은 차려 먹으니까요. 사실 지금은 휴직 중인데요. 치료 중인 아내를 대신해서 아이와 아내를 위해 점심, 저녁으로 밥은 차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직도 과일은 제가 아내보다 잘 깎습니다 ㅋㅋ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동료나 사수가 휴가를 가면 긴장이 됐습니다. 그들의 빈자리를 제가 메꿔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니까요.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그들의 일을 주의 깊게 인수인계 받고 긴장하며 일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 업무역량은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부사수는 사수가 휴가 갈 때 가장 성장한다"는 말이 있듯이요ㅎㅎ

삼쩜삼에 처음 왔을 때는 마케팅 리더가 없었습니다. 동료 1명과 둘이서 논의하며 만들어가야 했고, 경영진분들과 직접 소통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비즈니스, 생각을 구조화하고 표현하는 방법 등에 대해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했습니다.

팀이 커지면서는 리더십에 대해, 전략과 예산 관리를 위해서는 기초 회계와 재무제표 파악하는 법에 대해, 앱을 시작하면서는 앱 마케팅에 대해, 브랜드 마케팅을 시작하면서는 또 거기에 필요한 고민들을. 많은 자료와 책들을 찾아보고, 모임에도 가보고, 사람들을 수소문해 일대일로도 찾아다니며 묻고 배웠습니다.

힘에 부칠 때도 있어서 경영진분들께 CMO든 뭐든 제 위 포지션에 마케팅 리더를 뽑아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두 분은 제 요청을 거절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사수가 있었다면 제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며 역량을 키우려 노력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몸은 편했겠지만, 성장은 더뎠을 거고 제 역할에 대한 인정도 덜 받았지 않았을까요.

'배울 사람이 없다, 사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일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수, 보고 배울 수 있는 사수를 만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행운이기도 하고 그 기회를 잘 활용해야죠.

하지만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보면 어떨까요.

그 결핍된 환경이 가져다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수와 리더의 그늘 아래에서, 잠재적 역량이 충분히 있는 사람임에도 주도적인 역량이나 의사결정 경험을 해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장을 만들어내는 동력 중 하나는 책임감이고, 책임감은 독립된 환경에서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존할 사람을 찾기보다는 혼자 부딪쳐보며 경험을 쌓는 것이 더 귀한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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