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자의 한국 사회 보고서
이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과학자의 관점으로 쓴 시사평론'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저자는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에 회자된 주요 사건들을 진화심리학자의 눈으로 해부하고, 진단하고, 때로 나지막한 조언도 곁들인다. 정치, 도덕성, 연예인, 전염병, 미식, 테러, 헬조선 등 대중에게 수차례 회자된 주제를 한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에세이로 다룬다.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이지만, 이 주제를 해부하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은 대중에게 친숙한 관점과 많이 다르다. 진화심리학에 호감을 느끼는 독자라면 충분히 와닿을 수 있는 내용이며, 반감을 느끼는 독자라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아마 조심스럽게 추론컨데,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한 이유는 진화심리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한국 대중에 더 알리고 넓게 소통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에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들을 선택하고, 짧은 분량의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생소한 지식을 소개하기 위해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를 이용하지만, 대중에게 친숙한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 기존에 접해온 주류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새로운 관점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음미할 필요가 있는데, 한 두 페이지 짜리 에세이로 다루다 보니 깊이를 포기해야 한다. 때문에 이 책은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싱거울 수 있고,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를 폄훼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진화심리학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 호기심을 북돋아주는데만 성공했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책 내용 일부 소개
인간은 다양한 동식물을 섭취하는 잡식 종이다. 잡식종으로 생존하기 위해 좋은 음식과 해로운 음식을 구별하는 감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킨 결과가 미각이다. 인간이 느끼는 '단맛'을 고양이는 '단맛'으로 느끼지 않는다.
(맛은 어디에서 오는가 )
자연선택 메커니즘에서 최고의 덕목은 번식에 성공해 많은 자식을 얻는 것이다(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인간의 유전자는 마음을 그렇게 조종하게끔 적응되어 있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란 경쟁의 성패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자녀 수의 차이가 많아짐을 의미하므로, 번식에 실패할 확률이 높은 개체들에게 위험 추구 행동을 하게 한다. 실제로 한 사회 내의 경제적 불평등은 범죄, 건강, 생존율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왜 '헬조선'이 문제인가)
인류는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서 수십 명 정도의 작은 무리 안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면서 수백만 년을 보내며 마음을 진화시켰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평등한 사회'에 맞춰 살게 진화되어 있다. 왕국과 같은 수직적 위계질서 사회는 불과 1만 년 전부터 사회적으로 발명해낸 개념에 불과하다. 모든 아랫사람은 지나친 갑질에 분노하여 행동에 나서게끔 진화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갑질의 심리학)
(사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내용을 일부라도 더 소개하고 싶지만, 짧은 에세이를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는 시도가 자칫 정보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어 자제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사회심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 학창 시절을 회고해보면 당시에도 진화심리학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사회심리학 최고 학술지에도 진화심리학자의 논문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었다. 다만 주류 심리학계와 대중에게 진화심리학은 여전히 멀고 낯설게 느껴졌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 주류 심리학계는 진화심리학을 공정하게 대접해주지 않았고, 한국 대중에게 진화심리학은 너무 멀리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 당시의 나 또한 진화심리학을 공정하게 대접해주지 않았다. 아마 주류 심리학계가 진화심리학에 느끼는 불편함과 같이, 옛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편해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내가 과거에 비해 조금 진보한 점이 있다면, 심리학계의 케케묵은 논쟁 따위 잊고 지낸 지 오랜 평범한 생활인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세상사를 살아가던 최근,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나지막이 관심이 생겼다.
난 알고 있었다. 이 주제에 답을 할 수 있는 학문은 진화심리학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을 잘 알지도 못한다. 공부하던 당시에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졸업 후 심리학을 잊고 지낸지도 몇 해가 지났다. 과거에 공부한 지식이 흐릿해진 만큼 당시에 고집했던 사고의 틀도 무뎌졌다. 그리고 이제라면, 진화심리학 책을 다시 손에 들어보기에 적당한 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화심리학 대중서를 검색하던 중 우연히 이 책을 접하고 바로 구매했다. 사실 내가 찾던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한국 대중을 위한 진화심리학 교양서'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중환 선생님은 한국 심리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화심리학자'임을 자처하는 분이다. 과거 학회에서 발표하시는 모습을 강연장에 앉아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책 서문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스쳐 지나간 상념을 아주 짧게 줄이면 '수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 진화심리학은 생소하구나' 정도가 되겠다. 머리 속에 옛 기억이 스치면서 별생각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학창 시절에 비해 진보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면, 꼭 사야만 하는 이유가 없어도 책 한 권 정도는 그냥 살 수 있는 수준의 밥벌이는 한다는 것이다.
이 다음은 내가 원래 관심 가졌던 주제로 돌아가 조나단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읽어보려 한다. 왠지 느낌이 좋다. 이제는 무뎌진 전공 지식과 대중의 관점 사이 어디에선가 균형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진화심리학을 공정하게 음미해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