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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May 23. 2018

기본 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누구나 조건 없이 누릴 수 있는 복지 사회를 향하여

독서 모임에서 두 번째 읽을거리로 이 책을 선정했다. 평소 기본 소득에 대해서는 막연한 수준의 관심만 가지고 있었으나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는 터였다.

 


책 내용은 쉬운 편이라 어려움 없이 술술 읽었으나, 다 읽고 나서 다른 기사와 글들을 더 찾아 읽은 후에는 오히려 생각이 복잡해졌다. 한국 사회에서 기본 소득이라는 주제가 아직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는 각양각색의 정치/경제 논리가 정리되지 않은 날 것으로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기본 소득이 무엇이길래 다들 생각이 이리도 제각각일까. 책에서 소개한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에 따르면 기본 소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인에게 직접, 자격심사 없이 누구에게나, 조건이나 의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기본적 수준의 생계 해결에 충분한 금액을 지급한다.

모든 시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한다, '소득 = 노동의 대가'라는 개념을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실로 엄청나게 파격적인 주장이다. 이 파격적인 생각을 둘러싸고 각계의 사람들은 찬반 양측에서 다양한 의견을 내어놓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의제로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책 속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때가 되면 찬반 양측의 사람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중은 다양한 관점의 생각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점차 사회적 합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나도 내 나름대로 주말 내 읽고 생각한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주요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본 복지 체계에 대한 대안


찬)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체계가 해결하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다.
반) 왜 기본소득이어야 하는가. 기존의 복지 제도를 손질해서 더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찬성 측의 논리는 기존의 복지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기본소득을 도입해서 기존 복지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는 궁극의 보편적 복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송파 세 모녀 사건'만 보더라도 현재 한국의 복지 제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수급 자격을 신청하는 절차가 번거롭고, 자격의 요건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수급을 받아야 함에도 받지 못하는 선의의 피해자와 그 반대 경우인 부정수급자 모두를 양산하고, 그럼에도 이 수급 자격 심사를 위해 불필요한 행정 비용이 많이 들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으로 수급자에게는 스스로 경제적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낙인을 찍으며, 수급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급자 신세로 남아 있게 만드는 모순을 비판한다.


반대 측 주장에는 경제 논리와 이념 논리? 가 있다. 경제 논리는 기존 복지 제도가 나름대로 잘 기능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개선을 통해 보완해 나가는 편이 기본 소득보다 실효성이 있고, 재정인 면에서도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한편으로 기존의 복지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학계나 운동가의 이념적 입장에서는, 기존 복지 체계를 제대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으면서 기존 복지 체계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가당치 않다. 이들에 따르면 보편적 복지의 기본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는 일은 기존 복지 제도의 보완과 개선을 통해 가능하며, 이러한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도 않고 기본 소득을 논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오히려 섣부른 기본 소득 도입이 보편적 복지의 기본 이념을 훼손하는 역효과를 우려해야 한다([이상이] 지금 기본소득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


찬반 양측 모두 충분히 합리적인 논거와 사례를 제시하기 때문에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 같다.



2.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실업, 소득 양극화 해소의 대안


찬) 가까운 미래에 자동화와  AI의 파급 효과로 기존 직업의 상당수가 사라질 것이며, 남은 직업들의 소득도 점점 더 양극화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소득 = 노동의 대가'라는 근본적인 개념부터 수정해야 한다.
반)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실업은 현시점에서는 기우에 불과하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도 기계에 의해 많은 직업이 없어졌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기에 대량실업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찬성 측 논리는 노동시장의 당면한 현실 문제를 직시하자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는 '자본 vs 노동'이라는 낡은 사회과학적 분석 틀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본질은 기술혁명으로 인해 사람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반대 측 논리는 4차 산업 혁명으로 인한 대량 실업은 현재로서는 기우이므로, 19세기 초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선동은 그만두라고 일축한다.


4차 산업 혁명이 인간의 일자리 수에 가져올 영향에 대해서는 '감소시킬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내 총 일자리 수는 증가할 것이다'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다. 위의 찬성 측 입장은 '일자리 감소'가 맞다고 믿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2017년 아디다스는 신발 공장을 본국인 독일 바이에른으로 이전했는데 이 공장에는 직원 10명이 근무한다. 개도국 생산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자 600명이 하던 일을 고임금 노동자 10명이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현실로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그저 근거 없는 기우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불과 10년 내로 무인자동차가 상용화되어 운수 노동자들이 모두 직업을 잃는 상황이 되면 이 기우는 이미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40~50대 운수 노동자들이 재취업 교육을 받으면 아디다스 바이에른 공장의 고임금 노동자 10명과 같은 고급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까? 가망 없는 일이다. 대부분은 저임금 일용직 노동 시장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고, 그나마도 기계가 대체하지 않을 영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지 않을 영역이 과연 얼마나 될까? 별로 없을 것이라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상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2018 Google Duplex). AI가 가져올 노동시장 파괴를 우려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구시대적 러다이트 운동의 시대착오적 재현이라고? 천만의 말씀, 이건 2세기 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 누구의 밥그릇도 안전할 수 없다.


저자는 본문에서 '노동의 가치를 신성시하는 근로 윤리는 자본가와 지배세력이 일반인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인 개념이므로, 이젠 폐기할 때가 됐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을 역사 상 최대의 사기로 규정하며, 역사란 극소수 지배계급이 대다수 피지배 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며, 일생 동안 노동과는 담을 쌓은 채 호위 호식하며 써내려 온 이야기라고 적었다. 서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그리스의 민주주의, 로마의 공화정, 유럽의 민주주의 같은 것도 사실은 노예와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소수 백인 귀족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동양도 뭐 매한가지다. 이런 계급 지배 구조가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종의 한계를 초월한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에서 더 이상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면, 이제는 '소득 = 노동의 대가'라는 기본 명제를 수정하자는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3. 기본 소득 수혜자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성 입증


찬) 과거부터 몇몇 지방정부에서 기본소득의 효과성을 검증하는 실험을 진행했으며, 상당한 수준의 효과성을 입증했다.
반) 실질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사례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찬성 측에 따르면 최근 핀란드 정부가 진행 중인 실험을 포함, 가까운 과거에도 캐나다 정부, 아프리카 나미비아, 미국 알래스카 주 정부에서 기본 소득과 거의 같은 형태의 현금 지급 실험이 진행되었으며, 수혜자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대 측은 오히려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반대쪽으로 해석할 증거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이건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다. 과학 연구 방법론의 관점으로 보면, 현상의 어떤 단면을 관찰하고 측정하느냐에 따라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증거를 얻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 자기가 들여다보고 싶은 관점에서 증거를 수집해 들이밀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실험을 할 수가 없다. 핀란드의 사례와 같이 2년 간 월 70만 원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이미 '조건 없는 무기한의 현금 지급'이라는 기본 소득의 기본 개념과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그 소득이 평생토록 조건 없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2년 후에는 끊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심리가 같을 리 없다. 그래서 난 기본 소득의 효과성을 실험 설계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본다. 다만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사회적으로 논의의 장을 키워가는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4. 필요 재원 마련


돈 문제,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찬) 기존 복지 시스템에 사용되는 예산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돌리고, 추가로 누진세, 환경세, 로봇세 등을 도입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반) 엄청난 증세가 필요하기 때문에 도입에 앞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그 정도 예산이 있다면 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순서다. 이를테면 연금 소득세 공제 확대가 더 우선이다.


찬성 측은 기본 소득의 도입을 그 실현 가능성보다는 의지에 달린 문제로 보는 것 같다. 기존 복지 예산을 다 기본 소득 예산으로 돌리고 증세 좀 더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대 측은 실현 가능성에 훨씬 무게를 둔다. 기존 복지 체계를 다 없애는 발상도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만큼 큰 비용을 들일 것이라면, 시급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특히 연금 소득세 공제 확대와 같은 구체적인 선결 과제를 언급하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윤덕룡 "기본소득?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주는 게 사회보장의 원칙").


재원 마련은 제로섬 게임이므로 정말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다른 곳에 갈 예산을 빼와서 이 일에 할당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 당사자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해내야만 한다는 얘기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당장 노인 기초연금, 아동 수당 같은 재원을 빼다가 기본 소득 예산으로 쓰자고 한다면, 기존 복지의 수혜자인 노인들과 학부모들을 설득해내야만 한다.


때문에 이 대목이 기본 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 및 설득 과정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기본 소득 도입을 시도한다면, 기존 복지체계와 공존시키는 가운데 점진적, 단계적으로 도입해나가는 편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지급할 수 있는 현금의 액수가 너무 작아져 버려 최소한의 유의미한 효과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실로 어려운 문제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사뭇 기대가 된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미 청년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 기본 소득을 시작했다. 이 시도들은 지속될 수 있을까, 더 진보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기본 소득은 과연 보편적 복지 사회의 실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한 건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복지 사회는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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