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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Oct 02. 2018

옳고 그름

Moral Tribes, 조슈아 그린 저.

조슈아 그린의 Moral Tribes를 읽었다. 진화적 관점에서의 도덕 심리학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들을 위해 역서 제목을 '옳고 그름'으로 지었을 것이다.




1. 개인적 소회


책을 읽으며 얻은 감상과 생각을 적기에 앞서 미리 고백하면, 나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심리학과 관련이 전혀 없는 분야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위를 받은 지 올해로 7년, 나에게 심리학은 헤어진 옛 연인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학문에 빠져들어본 모든 이가 그렇듯 난 참 즐겁고도 진지하게 공부했다. 학위를 마치고 난 뒤엔 당초 생각했던 유학을 포기했다. 많은 일에 지쳐 있었던 나는 다시 익숙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홍대 앞 클럽에서 연주하는 무명밴드는 생업이 될 수 없었다. 돈벌이가 되는 일을 찾던 나는 데이터 분석이라는 유행을 발견하고 붙잡았다. 다행히도 심리학을 공부하며 통계학의 기초를 닦아놓은 것은 최소한의 밑천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지 이제 5년 정도가 지났다.


2009년은 내가 석사 과정을 시작한 해다. 위대한 지도자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난 왜인지 모르겠지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특별히 사회 문제에 큰 관심도 없었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렇게 벅찬 감정을 느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때 난 내가 공부하는 학문이 이런 난세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꼈다. 정치학을 했다면, 경제학을 했다면, 사회학을 했다면,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글 한 줄이라도 날카롭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하는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현실의 부조리를 평가하고 단죄할 의도가 애 진작에 없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가치 갈등이 빚어내는 사회 현상을 '가치중립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2012년, 내가 가난한 연주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대한민국은 18대 대선을 치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며, 2009년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강도의 좌절감을 느꼈다. 세상은 대체 왜 이렇게 부조리하며 난 왜 그제나 이제나 이다지도 무력한가. 심리학 공부는 다 무엇 때문에 했고 음악은 또 해서 뭐한단 말인가.


2016년,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자격이 없는 사람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참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한국은 참 어메이징한 나라다.


2018년, 내가 석사를 시작했으며 커다란 무력감을 느꼈던 해로부터 이제 10년이 흘렀다. 지난 10년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고, 나도 많이 변했다. 난 이제 심리학도 음악도 잊은 평범한 생업인이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느껴질 때 미련하게도 가치 논쟁에 매달렸다.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란 말이 무색할 만치 미련하고도 열정적으로. 내 공부가 부족했거나, 이론과 실제과 항상 같이 가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두 가지가 다 맞다.



2. 진화와 심리학


2018년 현재 진화심리학은 한국에서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전국의 심리학과 중 '진화심리학 연구실'을 표방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10년 전의 나도 진화심리학을 공정하게 대접해주지 않았다. '진화'라는 생물학 일반 이론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태도는, 어떤 과학 이론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결국 선호의 문제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unfalsifiable theory, reductionism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풀어쓰면, 당시 나는 진화심리학의 연구 가설은 모든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자연 선택과 성 선택으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반증 가능하지 않고 환원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진화심리학을 적극 지지하고 추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심리학자들은 대개 저 이유를 꼽을 것이다. 실험법을 주된 방법론으로 쓰는 연구자들에게 반증 불가능성, 환원론은 타협하기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사고하도록 훈련받고 그런 삶을 살고 있으니까. 최근 학계의 선후배들에게 지나가면서 들은 바로는 미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 주류 학술지에는 과거에 비해 진화심리학 연구가설을 검증하는 논문들이 더 많이 게재되는 편이라고 한다.


나는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진화심리학자와 전통적 실험심리학자 중 누가 논쟁에서 승리하는지에는 1도 관심이 없다. 어느 쪽이건 세상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으면 되지, 누가 맞건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내 직업은 데이터 분석가이지만, 연구실에서 하던 것과 같은 엄격한 실험설계 같은 건 현실 세계엔 없다. 내 일은 가능한 적은 자원을 들여 실용적인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3. 인간의 마음의 기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은 과학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위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건 진화 외에는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이제 난 과학을 신뢰하는 평범한 생업인으로서, 진화심리학을 가치중립적으로 받아들인다.



4. 도덕적 마음은 왜 생겨났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위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대안 또한 진화 외에는 없다. 인류의 조상은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은 유전자들의 운반체로서 수렵생활에 적응했다. 인간의 마음은 원시 수렵생활에서 생존하고 번식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서 발달되어 갔다. 정서, 휴리스틱 같은 것들은 무의식적이고 즉각적이라는 점에서 개체의 생존에 효과적이었다. 물론 정서, 휴리스틱 따위에서 끝이 아니었다. 거기까지였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 신, 제국, 화폐를 발명하지 못하고 계속 수렵생활에 머물렀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비의도적으로 수동 처리, 시스템 2를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5.  도덕적 마음을 진화에서 얻어진 부산물로 받아들인다면?


인류 마음의 기원을 진화에서 찾는데 동의한 사람이라면, 이제 도덕이 어떤 성스럽고 고결하고 당위적인 것이 아니란 걸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이유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냥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몸에 박혀있던 기계장치 같은 거다.


과거 내가 크나큰 좌절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무의미한 가치논쟁을 했던 건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어렴풋이 알더라도 이성이 감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코끼리와 기수' 비유로 이를 적절히 묘사했다. 난 올해 초에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읽었다. 5년 전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6. 다름을 인정하라


'바른 마음'에서 하이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하이트는 미국의 진보, 보수, 자유주의자들에게 '당신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걸 서로 다르게 느낀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당신의 반대편에서 맞서는 사람이 당신과 다르단 걸 받아들여라. 사실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해라'라고 말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발간된 건 2012년, 오바마 2기가 시작하던 해였다. 나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마 2기가 시작하던 해에도 아마 미국 사회는 매우 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2016년에 트럼프가 당선된 게 그냥 된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린은 책의 후반부에서 하이트를 언급하며 '그는 중도주의자에 가깝다'라고 적었다. 하이트는 진보에 가까운 중도주의자로서, 자신의 조국이 극심한 갈등으로 치닫는 현실을 중재하고 싶었을 것 같다.



7.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인가?


조슈아 그린은 도덕 심리학자이기에 앞서 실용적인 도덕철학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도덕적 마음 과정이 시스템 1의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과거 철학자들이 논증하고자 했던 보편적 도덕 원리가 실은 시스템 1을 합리화하기 위한 불가능한 시도였음을 논증한 뒤 대안을 찾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공리주의다.


우리가 늘상 하는 가치 논쟁의 기본 전제인 권리, 가치 같은 것들은 사실 호모 사피엔스 무리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오는 과정에서 우연히, 때론 의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치 논쟁을 할 때 그런 허구적인 전제들에 의존해선 안 된다. 나의 정의가 당신의 부정의일 수 있음을 서로 이해하고 동의한다면, 이제 권리나 가치는 집어치워야 한다.


공리주의는 '모두의 행복을 최대화하자'는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결과주의다. 그래서 실용적이다. 우리가 토론을 마쳤을 땐 그저 정신승리에 만족해선 안 된다.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서로의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


칸트와 존 롤스 같은 합리주의 철학가들은 공리주의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재화의 총합 증대'와 같이 협소하게 해석하지만, 실제로 공리주의가 제안하는 결과의 총합은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는 '노예제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면 노예제에 찬성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노예제를 허용할 경우 노예 처지가 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부정적 경험의 총합,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하는 부정적인 경험의 총합은 이를 통해 얻는 긍정적 경험의 총합을 훨씬 압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예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벤담과 밀은 노예제에 반대하고 여성 인권을 옹호했다.


우리가 맞서 싸우는 걸 멈추고 대화하고 타협하길 원한다면, 토론이 끝났을 때 허울뿐인 명분이 아닌 손익계산서를 손에 쥐고 돌아서야 한다. 나는 공리주의를 제안하는 조슈아 그린에 동의한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서야 하는 부조리들


하이트와 달리 그린은 도덕 심리학자이기에 앞서 실용적인 도덕 철학자로, 명백한 악과 부조리에는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고 설파한다.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저열함을 제압할 때는, 권리와 의무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꺼내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 사피엔스는 보편적인 의무와 권리 같은 것들에 쉽게 공감할 수 있으니까, 명백하게 저열한 부조리를 제압할 때 다른 사피엔스들에게 공감을 호소할 수 있는 도구로는 매우 효과적이지 않은가.


한편으로 가치 논쟁을 하게 되면 시스템 2를 사용하고, 가치가 아닌 사실에 집중하라고 한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이고, 그는 실험실에서 얻은 증거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내 생각에 현실에서 써먹기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주장들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공리주의자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가능할까, 저잣거리 논쟁에는 쉽게 써먹기 어려울 것 같다. 대화와 타협, 말은 쉽지만 머리로 이해해도 역시 실천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9. 아마티야 센의 강의실에 앉은 조슈아 그린을 상상하다


최근 트레바리의 '국경'이라는 모임에서 아마티야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을 읽었다. 그를 형용하는 수식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인도 태생,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도덕철학자이자 후생경제학자, 빈곤과 불평등에 주목한 '경제학의 양심' 등..


센이 자유로서의 발전을 써낸 1999년, 그는 하버드에 재임 중이었다. 그린은 철학과 학부생으로서 센의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그린은 '감사의 말'에서 존경하는 스승의 목록에 아마티야 센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공리주의를 열렬히 수호하는 그린과, 공리주의를 거부한 센의 생각이 계속 오버랩되었던 터였다. 감사의 말에서 센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만 센의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부생 그린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센은 명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경제 발전의 목표는 사회 구성원의 '실질적 자유 증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발전의 결과로 얻어지는 '부' 자체에 매몰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센은 공리주의와 존 롤스의 도덕 모형이 경제 발전의 성과를 평가하는 도구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센이 지적한 공리주의의 한계를 간략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분배에 대한 무관심 2) 권리, 자유, 기타 비효용적인 관심사에 대한 방기 3) 적응과 심적 조절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약자들의 사정을 무시.


내용을 곱씹고 다시 간단하게 적어보면, 센이 거부했던 공리주의는 그린의 공리주의와는 달랐던 것 같다. 그린이 제안한 대로 공리주의의 아이디어를 '사회 전체의 긍정적 경험의 총합'으로 적극적으로(그리고 포괄적으로) 해석한다면, 약자들의 딱한 사정을 쉽게 무시할 수 있을 리 없다. 센이 주장한 실질적 자유의 개념은 그린이 옹호하는 공리주의의 '행복'과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두 사람이 풀어야 했던 문제도 다르다. 센이 맞서고자 했던 문제는 빈곤과 불평등이었다. 그린이 맞서고자 하는 문제는 도덕적 부족들 사이의 갈등 해소다.


그린이 다시 센을 만나서 공리주의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선생님, 제가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선생님이 생각하신 그것과는 다릅니다. 무슨 얘기냐면요...'



10. 생각을 마무리하며


도덕 심리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졌다. 10년 전 그랬던 것 마냥 스터디라도 만들어볼까. 읽고 생각하고 친구 선후배들과 둘러앉아 몇 시간이고 토론하면 즐겁지 않을까. 다들 나이 앞자리 숫자는 바뀌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언갈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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