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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Sep 16. 2019

정치의 발견

한국 진보파를 위한 현실주의 정치학 강의

저자 박상훈은 정치학 박사로, 지역주의와 한국 정치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했다. 진보 계열 언론에 칼럼도 여러 편 기고했으며 책 본문에서도 이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2010년 '정치바로아카데미'에서 강의한 소규모 강의의 산물이다. 수강생 대부분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파들이었고, 저자는 '현실주의 정치관'의 입장에서 한국 진보파들에게 '말을 거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개인적으로 정치를 주제로 한 책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고, 지난 몇 년간은 정치에 관한 생각에서도 멀리 떠나 있었다. 꽤 오랜만에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펴 들었던 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책은 얇지만 심도 있는 주제를 가볍지 않게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을 이렇게 구어체로 쉽게 써 내려간 것은 저자의 내공이 깊기에 가능한 일이며, 한 편으로는 '대중에게 공감하는 말의 중요성'에 동의하는 저자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공부를 충실히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내 생각을 곁들여 적어보았다.



1. 리더십에 대한 강조


저자는 막스 베버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베버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제도로서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을 통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을 리더로 선출해, 이 모순된 과업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야 한다. 이 주장을 곱씹으며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불편함의 이유는 대략 두 가지였다.


첫째,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잘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한가?'라는 생각이었다. 민주주의의 순기능 중 하나는 다양한 의견을 자유로이 허용함으로써, 쟁점을 공론화하고 언제든지 더 나은 대안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가 아니던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설사 좀 떨어지는 리더가 선출된다 하더라도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 베버와 저자의 '지도자론'을 뒤집으면, 훌륭한 리더를 선출하는데 실패한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얼마나 성숙했건 필연적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적고 나서 곧바로, 지난 두 정권 간 퇴행을 거듭했던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고하며 역시 지도자가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대 정치제도 중 현대의 민주주의만큼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제도는 없었지만, 지금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개선의 여지없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항상 변화하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완벽한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제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작동할 때 그걸 바로잡는 일은 주권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주권자의 민의를 올바로 구현해야 하는 지도자의 역할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구나. 지도자, 리더십의 중요성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두 번 째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런 초인적인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아직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불가능한 조화를 실천한 정치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아닌가? 저자는 경향에 기고한 칼럼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측근에게 '정치, 하지 말게'라고 말한 것을 두고 책임 윤리가 부족한 언행이었던 것처럼 적었다. 측근에게 개인적으로 건넨 말까지 책임 윤리의 부재로 단죄할 사안이라 해석할 수 있다면, 정치가라는 한 개인이 감내해야 할 윤리적 중압감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런 초인적 윤리관을 감내할 수 있는 정치가를 한국은 한 명이라도 보유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은 있는가?


한 편으로 그런 초인의 역할을 한 개인에게 기대해야만 진짜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플라톤적 철인 정치와 묘한 유사함을 느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 투표로 권력을 선출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철인 통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 지도자 한 사람의 역량에 과도한 역할을 몰아준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다. 앞에서 적었듯 유능한 지도자를 얻지 못한 민주주의가 퇴행할 수밖에 없다면, 지도자의 역할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지 않은가. 개인 한 사람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막중하고 무거운 짐이 아닌가?


이어서 자연스럽게, 훌륭한 지도자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를 정당과 시민 사회가 다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가 한 사람은 그 사람 개인이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 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시민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를 그저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의원 한 사람이 오열하며 '어떻게 만든 사람인데...'라고 탄식하던 장면이 기억을 스쳤다. 그렇다. 그 사람은 한 사람의 위대한 개인이었지만, 그 사람을 만든 건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의 염원이 모인 결과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지도자란, '그 사회의 집합적 지성과 인격 그 자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 이념, 특정 가치를 우선하는 편향적 세계관.


저자는 비판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좋아하지만 실천 이론으로서는 한계가 많다고 본다. 나도 동의한다. 덧붙여서 개인적으로, 이젠 어떤 종류의 '이즘'에도 매혹당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Idealogy, ism, 주의, 이런 것들은 예외 없이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 위에 서 있다. 이를 추종하고 맹신하는 사람들은 그 '주의'의 근본 가치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이념은 종교적 맹신을 낳고 전염시킨다. 그러나 세상에 보편적으로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는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막시즘이라는 이념은 칼 막스가 주장한 유물론 사관을 추종하고 그 언젠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공산주의 혁명을 기다리자는 관점을 '제공'했는데, 그러한 생각 자체에 교조적으로 사로잡힌 추종자들은 중요한 시기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나치즘의 도래를 방관했다. 막스의 예언에 대한 도전은 허용되지 않았다. 비단 막시즘뿐만이 아니라, 다른 ism들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 역기능을 초래할 여지가 많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런 이데올로기들을 통틀어 '종교'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제공해주고, 때론 전염성 강한 설득력이라는 도구적 기능을 제공하기도 한다. 직업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념을 도구적으로 잘 사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념에 파묻히고 종속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가 강조했듯 정치를 위해 이념이 있는 것이지, 정치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해선 안 될 일이다.

 


3.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이념에 대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불확실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 사실 평소 많이 생각해오던 주제인 불확실성, 지적 회의주의라는 주제를 이 책에서 다시 만나서 의외였고, 반가웠다.


세상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시대의 중심 가치와 시대정신은 변한다. 인류의 지식 또한 매 순간 임시적이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시대를 풍미한 이념도 수십 년만 지나면 전혀 안 맞는 얘기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념이란 덧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불확실한 세상에서의 삶, 지식의 임시성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념 같은 것에 쉽게 눈이 멀 일은 없을 것이다.


불확실성에 대한 성찰은 지적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불확실성을 존중하는 사람은 언제든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고 수용함에 인색하지 않다. 지적으로 겸손하며, 그 덕분에 항상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겸손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 모르고, 자신이 다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산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다.



4. 타협의 중요성


저자가 강조했던 내용 중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타협의 중요성이다.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본다.


사회는 원래 갈등 투성이이며, 갈등을 공론화하고 해소하기 위해 정치라는 걸 한다. 수많은 이해관계를 지닌 시민들이 갈등을 직접 해소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갈등을 해소해줄 대리인을 지지하고 선임한 게 정당이고 정치인이다. 직업 정치인은 위임받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만, 마지막 결과물은 그들 간의 타협으로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타협은 정치의 완성이다.


알린스키가 말하고 저자가 인용했듯, 정치가가 타협하는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협이라는 단어에서 도덕주의나 거부감을 느낀다면 직업 정치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직업 정치인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이고,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타협을 해야 한다. 



5. 대화의 중요성


비단 정치인뿐 아니라, 정치적 논쟁을 주고받는 일반 시민들의 경우에도 생각해볼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싸움이 끝났을 때 명분보다 중요한 건 손익계산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언행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실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을 퍼부을 상대를 발견했고, 화를 마음껏 쏟아낸 다음, 기존의 생각을 더욱 확증한 채 돌아서서, 다음에 그런 자리가 생겼을 때 또 화를 퍼붓는 걸 반복하는 건, 현명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 또한 나와 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증오심을 더 강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니까. 행여나 그 사람이 돌아서서 미온적인 중도파 한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더 적극적이 된다면, 내 경솔한 행동으로 한 표를 잃는 꼴이 되지 않는가.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을 때, 이성적으로 말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인간의 도덕적 마음은 원체 복잡하고 미련하게 생겨먹어서 어설픈 설득은 씨알도 안 먹힌다...



생각을 마무리하며.


오래 잊고 지내던 정치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읽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민주주잉에서의 한 시즌이 기대된다.



내용 요약


1강. 정치는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상식으로 '정치에 대한 정치는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 '정치가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정치하면 좋은 사람도 더럽혀진다'와 같은 것들이 있다. 저자는 이를 바로잡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식들은 대중에게 반정치주의를 유포하고 강화하는 길인데, 이는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반정치주의가 상식으로 자리 잡을 때 득을 보는 것은 기득권이다. 반정치주의에서 득을 취한 한국 사회의 기득권은 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정권에서 80년대 이후 재벌로 바뀌었으며, 언론과 검찰은 조력자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진보파임을 표방하는 운동권 세력도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반정치주의의 확산에 일조해왔다.


한편 한국의 선관위는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지나친 규제를 남발하면서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의 역할을 제약하고 있으므로 개선되어야만 한다. 정당의 정치활동에 대한 과도한 규제는 곧 대중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며, 이는 민주화 이후 20년 간의 투표율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투표율 하락폭이 부자 동네보다 가난한 동네에서 더 컸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결론적으로 정당의 선거 활동 제약으로 인해 더 타격을 받는 것은 서민층이고, 상대적으로 기득권의 정치적 입지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면서 선거 부정과 부패를 줄어들게 해야지, 부정부패를 없애겠다며 민주주의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 이 이상 유력한 수단도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법 중,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따라서 정당 정치를 활성화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집권정당으로 만드는 일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한국의 80년대 민주화에는 '운동'이 큰 역할을 했지만, 이제 시대는 변했고 사회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업은 운동이 아니라 정당 정치를 좋게 만들고 잘하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운동권 출신 진보파들이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고 싶다면, 이젠 과거의 향수와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정당 정치를 잘하고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국가 간 민주주의 성취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 두 개로 '진보 정당의 경쟁력', '노동조합의 힘' 두 가지가 있다. 진보 정당의 경쟁력은 정당 정치로, 노동조합의 힘은 시민운동으로 발현된다. 한국 진보파는 운동으로 성장했지만, 이제는 정당 정치에 더 주력해야 한다. 민주주의 안에서 사회를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밖에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던 시도였던 혁명은 모두 실패했다. 마오쩌둥, 체 게바라, 스탈린, 김일성 등으로 볼 수 있는 혁명의 말로는 독재와 세습과 저개발과 빈곤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던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이후 당면한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불평등, 빈곤 등의 문제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다. 실력 있는 진보 정당을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진보 정당과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를 더 깊고 넓게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보 안에 있다. 진보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은,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이 잘못된 데 있다.



2.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


이 장의 주된 설명 틀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다. 막스 베버는 사회학의 시조 격이지만, 이른바 '진보의 계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저자는 진보적이되 좀 더 정치적이고 좀 더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나 족보 따위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 정치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공동체의 이상을 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 실행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복종과 의무를 부과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강제력에 기초를 두게 된다. 이른바 '선한 목적'과 '악마적 강제력'의 딜레마는 모든 문명사회가 맞닥뜨리는 딜레마다. 


베버에 따르면 국가란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다. 이런 막중한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고 행사하는 정치가는 '선한 의도와 악마적 강제력의 모순'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베버가 제시한 '신념 윤리'는 선한 의도에, '책임 윤리'는 악마적 강제력의 사용에 대한 책임에 해당한다. 베버는 명문화된 제도와 법칙으로 이 둘을 적당히 타협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음은 베버 원전 발췌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적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가 그 어떤 이론, 철학, 제도, 법규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은, 정치의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고민되어야 하는 것이자, 결국 정치가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선한 목적과 도덕적으로 의심될 만한 수단을 결합해야 하는 정치의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담대한 인물, 그러면서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을 통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유능한 인물만이 윤리적 기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의 현실을 이끌 수 있다는 것, 베버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는 소명 의식과 담대함을 갖는 정치가를 자신의 정치 이론의 중심에 두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적으로 무기력하고, 또한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그에 대해 적절하게 답할 수 없는 자는 정치가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베버에 따르면 위와 같은 직업윤리를 갖춘 강력한 지도자가 가장 중요한다. 이런 지도자가 없는 정당 정치는 '명망가들의 허영심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거나 당 관료들의 손에서' 놀아나게 된다. 그래서 베버는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전형적인 파별 본능에 빠지고 명망가들의 동업 집단으로 변해 버려 저널리스트들이 득세하고 관료 본능이 당을 지배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베버를 생각하면서 한국 진보 정치의 최근을 회고하면, '정치, 하지 말게'라고 말했던 노무현 대통령,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부재한 가운데 실망스럽게 분열해 간 통합진보당, 모두 아쉬움이 남는다. 진보의 열정이 정치적 이성과 만나고 그것이 좀 더 넓고 풍부한 인간적 기초 위에서 성장해 갈 때 진보 정치는 매력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소명 의식을 갖는 좋은 정치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3강. 정치의 기술, 실천의 기술


이 장의 주제는 정치의 실천론으로, 사울 알린스키와 버락 오바마의 사례를 다룬다. 사울 알린스키는 시카고의 가난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 시절 대공황을 경험하면서 빈민 지역 운동을 했다. 미국 빈민 지역 운동의 모델 내지 전통을 만든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오바마는 모두가 아는 미국 43, 44대 대통령이다. 알린스키가 운동가의 실천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면 오바마는 정치가로서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운동가와 정치가로서 두 사람의 실천론에서 어떤 간극이나 긴장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바마는 알린스키의 실천론을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만큼 유사한 면이 많다. 알린스키는 '의사소통의 기술'을 강조했고 오바마는 '말의 힘'을 강조했다.


알린스키는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일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실 정치에 대해 소극적으로 일관해 온 한국의 운동가들은 알린스키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체제를 거부한 모든 투쟁, 혁명은 비참한 실패로 마무리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알린스키는 지적 회의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긴 것을 보면. 알린스키는 이런 말들도 남겼다.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는 어둠에 가득 차있고 외적으로는 잔혹함과 고통, 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
인생은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인생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이다. 조직가는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바로 그럴 때에만 냉소주의나 환멸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다. 환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반응을 마치 관찰자처럼 살펴볼 수 있다


알린스키는 갈등, 권력, 타협과 같이 사람들이 터부시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정의를 남겼다. 갈등은 민주적 삶과 불가분의 관계이고, 권력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필수적 수단이며, 타협은 정치가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또한 정치가는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대중관과 관련하여, 많은 정치가들이 겉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대중을 무식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알린스키는 그런 생각을 '자유 사회의 정신분열증'이라고 말했다. 또한 알린스키는 상상력, 유머를 강조했다. 


오바마는 연설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알린스키가 강조한 '소통의 기술'을 연설이라는 '말의 힘'으로 실천하고 대중과 소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강.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


민주주의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했고, 아테네라는 폴리스의 정치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19세기 말까지 민주주의는 거의 대부분의 정치철학자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 대중의 정치 참여 요구가 강해지면서 공화주의라는 말과 민주주의라는 말이 병용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민주주의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자와 여성을 주축으로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이 전개되고, 진보 세력들이 대중 정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발명해 기존 체제에 도전하면서 민주주의는 더 폭넓게 확산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좌파는 혁명을 포기하고 우파는 착취를 포기하는 길'을 받아들였고, 비로소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전환'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 변동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한국은 근대 이전의 구체제가 제국주의에 의해 해체된 뒤, 해방 후 외세에 의해 하사되듯 민주주의가 주입되었다.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들이 모두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논할 때 신화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도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얘기가 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의 핵심은 대의제를 제대로 하고 투표를 중요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있으며, 이 사실을 부정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진보도 좋은 정당이 되어야 하고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정치 이론도 발전시켜야 한다. 유능한 정치 엘리트를 배출해야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결집할 수 있어야 한다.


샤츠 슈나이더의 책 '절반의 인민주권'은 갈등이 민주주의의 엔진이라고 말하며,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주장한다.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당이라고 한다. 책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치체제라 할지라도 정당정치가 사회 갈등을 폭넓게 조직하고 동원하고 통합하지 못한다면 그때의 시민 주권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슈나이더에 따르면 갈등이란 지역, 종교, 소득, 직업, 성, 고용형태 등 우리가 서로를 정의하는 사회적 차이를 뜻한다. 민주주의는 이런 갈등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이고 또 그런 갈등 때문에 존재한다. 갈등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의 영역에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가 다를 경우, 정치는 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되며, 현실과 유리된다.


일반 대중이 자신들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당 활동을 하는 것이다. 정당은 갈등에 관여된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갈등의 규모를 확대하고, 갈등의 수를 줄인다. 정당을 통해 갈등의 수를 줄이되 갈등의 규모는 사회화해서, 가장 바람직한 공익이 무엇인지를 정당들이 서로 달리 대표하게 하고, 그렇게 형성된 두세 개의 공익적 대안이 선거에서 경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민주주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5강.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들


이 장은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이라는 책의 내용으로 시작한다. 19세기 말 이후 유럽 진보 정당들의 내부 논쟁과 역사를 다루면서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발전하고 자리 잡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 초기 형성기에서 진보 정치는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독해하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정치 전략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시즘은 유물론적 발전 단계에 따라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역사주의적, 숙명적, 결정론적 예언을 했다. 따라서 현실의 민주 정치가 가져다준 기회를 활용할 것을 부정적으로 폄하했다.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파국을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들이 버린 정치의 공간은 나치즘이 장악했다. 이 책이 묘사하듯, 정치에서의 소극성은  범죄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편 반민주적, 반정치적 좌파도 위험하다. 혁명론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혁명론은 종말론적 사고를 강화하기 쉽고, 실제 혁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반정치적인 사고 경향 때문에 혁명 이후를 전체주의 사회로 이끌기 쉽다. 그러므로 진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보수만이 아니다. 오히려 반민주적 좌파 내지 혁명적 좌파와의 싸움이 더 힘들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하에서 진보는 성장하고 집권하기 어렵다.


과거 한국 진보파의 대부분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과 그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이었다. 과거에는 진보파들에게 운동정치가 일종의 신앙처럼 여겨졌을 수 있으나, 21세기의 한국 민주주의에 더 필요한 것은 이제 정당 정치다. 진보파는 그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투표로 검증받아야 한다.


한국 진보파는 추상적 이념 논쟁에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 그러나 이념이 정당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정당이 이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리더십의 발전 없이 정당 조직을 통합할 방법은 없다. 거대한 규모의 정치조직을 제도나 추상적인 규칙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실이 아니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 정치에서 정당은 곧 국가의 통치권을 두고 경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정당론의 마지막 패러다임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안젤로 파네비안코라는 이탈리아 정치학자가 있다. 그는 왜 어떤 진보 정당은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어떤 정당은 그렇지 못했는가를 문제를 탐구했다. 그의 결론은, 그 어떤 제도나 규범으로도 권력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성공한 진보 정당은 모두 정치가와 지도자의 역할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당내 결정 구조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늘 협소한 정파 논리를 우선시했던 우리 사회 진보 정당들이 한 번쯤 생각해볼 주제일 것이다.



6강. 정치적 이성과 말의 힘


이 장은 앞서 내용에 대한 보론으로, 저자가 기고한 몇 편의 칼럼으로 이뤄져 있다.


1) 민주정치 이상은 말의 힘을 통해 실천된다

2) 반대를 말하는 방법에 관하여

3) 내용의 단단함과 표현의 부드러움

4) 돈 문제와 개인 삶에 대한 존중

5) 권력과 인간

6) 진정성의 정치가 과잉될 때

7) 대표와 위임의 모호함: 정치가 개인의 변덕에 좌우되는 민주주의

8)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9) 통치자는 누가 통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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