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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예 Feb 27. 2016

묘지 가이드, 죽음을 해석하다

페르 라셰즈 묘지 Cimetière du Père-Lachaise에 왔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은 이후 묘지를 찾은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타국의 공동묘지라니! 파리까지 와서 공동묘지를 구경 갔다고 하면 우리 엄마나 친구들도 의아해 할 테지만 내가 찾은 페르 라셰즈는 다르다. 쇼팽, 모딜리아니, 발작, 몰리에르 등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의 위대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정원식 묘지로 유명하다. 무덤을 둘러싼 섬세한 조각들과 잘 가꿔진 정원은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나는 묘지투어를 하기로 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묘지투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묘지투어란 해당 묘지에 대한 유래 및 묘지에 안치된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묘지가이드 (guide au cimetière)가 방문객들에게 묘지를 안내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묘지투어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무덤도 하나의 생활 속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이곳의 장례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무덤은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많이 발견된다. 저택 내에 있기도 하고 바티칸 성당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 성당의 지하에는 많은 죽은 자의 관을 보관하고 있다.    





가이드는 베르트랑 베이에른 Bertrand Beyern씨였다. 그는 우리가 매일 아침 회사를 가는 것처럼 페르 라셰즈로 출근한다. 그는 죽음의 발치에서, 십자가의 그늘에서, 끝이 없는 고독한 오솔길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한다. 그는 강연도 하고 책도 쓰는 소위 잘나가는 실력자(?)묘지 가이드이다. 구름은 흐르지 않고 낮게 머물렀다. 1월의 찬 공기가 묘지를 스산하게 만들었다. 묘지의 가이드와 여덟 여명의 방문객들 중에 동양인은 오직 나와 친구뿐이다. 우리는 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가이드는 페르 라셰즈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1804년, 나폴레옹 1세는 건축가 브롱냐르 Brongniart에게 묘지를 설계하도록 명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은 그 인종이나 종교에 관련 없이 묻힐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혁명적이었는데 그 전에는 무신론자, 비기독교 신자, 자살한 이들은 신성한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롱냐르는 묘지의 설계라는 면에서 나폴레옹만큼 혁신적이었다. 그는 찾아온 이들이 조각품들을 감상하며 나무가 늘어선 산책로를 거닐 수 있고, 죽음의 이미지를 승화시키는 정원 같은 묘지를 구상했다.     


루이 14세의 고해신부이자 파리의 대주교였던 ‘페르 프랑수아 드 라 셰즈(Père François de la Chaise, 1624~1709)’의 이름을 딴 페르 라셰즈는 현재 파리의 묘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넓이가 44헥타르(바티칸 전체면적과 동일)에 이르고 30만구가 넘는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다. 거대한 규모로 인해 내부의 수많은 묘비들은 지도로도 찾아다니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이 곳에 오는 연인들은 꼭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떨어지는 순간 미아(^^)가 되기 때문이란다. 입담 좋은 가이드의 얘기에 한참을 웃으며 듣고 있자니 투어가 기대가 됐다.     


가족단위로 혹은 연인끼리 산책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는 인물의 묘를 미로 찾기처럼 찾아가는 즐거움도 있으며 그 이름을 발견하는 기쁨도 컸다. 그들의 무덤 앞에서면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가 그들의 무덤 앞에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헌책방에서 날 법한 오래된 냄새가 났다. 그건 언제부터 자라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겨울나무에서, 채 꺼지지 않은 양초에서, 날갯짓하는 비둘기에서 나는 것일까.     





나는 이 곳 페르 라셰즈의 많은 유명인사들 중에 오스카 와일드를 꼭 만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는 날까지 날 웃게 만들었기에. 그는 값싼 레프트뱅크 호텔의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방의 벽지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친구들을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이 벽지가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오스카 와일드는 한참동안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묘비를 거쳐 바로, 드디어, 마침! 오스카 와일드의 묘 앞에 섰다. 사진에서 본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의 묘비를 뒤엎은 수많은 키스 자국! 와일드에게 경외심을 표현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나도 과감히 붉은 립스틱 자국을 남겼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만남’의 자리였다.  





잘 정돈된 묘비의 사이사이를 걸으며 우리 일행은 가이드 베이에른씨의 열정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는 그 동안 수집해온 자료들을 꺼내 보이며, 짐 모리슨 Jim Morrison, 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이브 몽땅 Yves Montand…. 등등,  여러 인물들에 얽힌 운명, 사랑, 비극을 들려주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즐겁게 공존하는 유쾌한 공동묘지의 오후였다. 작품 전시장이 따로 없다. 가도 가도 끝없는 각양각색의 묘비들, 아름다운 조각물과 장식물들… 베이에른씨의 길고 긴 가이드는 묘지 폐장시간인 6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4시간의 긴 투어였지만 한 순간처럼 느껴진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작별 인사를 나눈 그 자리에서, 그는 또 나의 요청에 즐겁게 응했다. 이 끝없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파리에는 묘지가 여러 개 있는데 페르 라셰즈에서만 가이드를 하시는지요?

아니요. 파리에 있는 모든 묘지의 가이드를 해요. 그리고 내 자신의 교양을 위해 유럽의 모든 묘지를 돌아다니죠.     


어떻게 묘지가이드라는 직업을 갖게 됐나요?

부모님과 함께 6살 때 페르 라셰즈에 처음 왔어요. 어린 아이니까 놀러나온 것처럼 신났죠. 자연이 있고 여러 석상이 있고 읽을거리가 있었으니까요. 활발한 아이에게 페르 라셰즈는 천국이었어요. 부모님께서 화가 들라크루아, 소설가 알프레드 드 뮈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시는 걸 듣고 어른들의 인생에서 필요한 거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페르 라셰즈에 대한 책을 사달라고 부모님께 부탁했죠. 그리고 몇 년 동안 그 책의 정보들을 공부했어요. 어린 아이는 많은 것을 터득할 수 있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아는 시인을 대라고 하셨는데 에밀 블레몽, 파르스발 그랑 메종 등을 척척 말할 수 있었어요. 그들을 아는 사람은 반에서 제가 유일했죠.     


묘지에서 뺄셈도 배우셨겠네요?

아이들을 묘지에 데려오면 먼저 읽는걸 배우죠. 이끼가 낀 글자를 해독했고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를 뺄셈했어요. 야외 사전인 셈이죠. 거기서 인생이 짧던지 길던지 그 길이는 우리한테 달려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돼요. 하지만, 인생에는 넓이, 두께와 농도도 존재하죠. 그것들은 우리한테 달려있어요.    


그럼 어렸을 때부터 파리에 사셨나요?

아니요. 저는 지방에 사는 행운을 누렸어요. 욕망하는 대상이 멀리 있을수록, 호기심이 만족시켜지지 않을수록 인간은 더욱 열정으로 가득 차죠. 왜냐하면 실행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쪽이 더 쉬우니까요. 제가 페르 라셰즈에 자주 올 수 있었다면 그저 한 바퀴 돌고 지루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멀리 있다는 건 신화적이죠. 살아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제게 충분치 못해요. 제 서재에는 살아있는 작가보다 죽은 작가들이 더 많죠. 그리고 저는 죽은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즐겨 들어요.   


흐억 죽은 사람들이라뇨?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크크... 베이에른씨의 독특한 생략화법에 잠시 당황하여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

엉뚱한 아가씨, 모차르트나 마이클 잭슨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제 직업의 핵심은 ‘추억’이에요. 기분 좋은 추억이요.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하죠? 여행하고 먹고 사랑하고 꿈꾸는 것, 그리고 추억하는 거예요! 잊지 않고 추억한다라는건 아주 멋진 일이잖아요!    


묘지의 가이드가 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묘지와 정확히 해당되는 학과가 없어서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역사, 지리, 사회 등을 공부했어요. 가능한 많은 수료증과 학위를 땄죠. 하지만 저는 급여 명세서를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스스로 큰 만족감을 느껴요. 평생 이 일만 했으니까.  


돈은 많이 버시나요?

아니요. 가짜 가이드들이 판을 치거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절 찾아오지 않아도 제 일의 질을 떨어뜨릴 수 없어요. 제가 할 일을 할 뿐이죠.     


페르 라셰즈 묘지는 왜 특별할까요?

페르 라셰즈는 범세계적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큰 묘지도 가장 아름다운 묘지도 아니지만 유일하게 방문객들이 잘 아는 곳이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분명히 페르 라셰즈의 여러 인물들을 알고 있어요. 쇼팽의 묘비에 폴란드인들을 마주치고, 미국인들은 짐모리슨을 찾고 아일랜드인들은 오스카 와일드에게 인사하기를 원하죠.

묘지는 항상 그 도시를 반영하는데 수많은 유명인사들의 파리가 가진 역사로 기념물이 발에 치일정도로 많은 것처럼 페르 라셰즈에서도 50m도 못가서 쇼팽, 오스카 와일드 등의 묘비를 만날 수 있어요. 그 밀도가 이 묘지의 특별함이에요.     


한국에서 사람들은 묘지를 무서워해요. 죽은 영혼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해서 해코지 할까봐 도시 외곽의 산등에 조성하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위험을 직면했을 때, 어떤 위험이든 그 이유와 결과가 존재해요. 근데 사회는 이유와 결과를 항상 헷갈려하죠. 죽음이 무섭다면 우리의 죽음의 원인이 뭔지 생각해봐요. 병, 전쟁, 사고……. 이것을 피하고 무서워해야죠. 죽음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에요. 죽음의 결과는 바로 무덤이죠. 한 장소를 지정해서 이름을 새기고 날짜를 상기시키는 것은 사회가 발견한 아마 가장 부드러운 해답이 될 수 있겠어요.

우리를 오싹하게 한다는 이유로 무덤을 없앤다고해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을 거예요. 무덤은 잘못이 없답니다!

제 집 옆에는 오토바이 가게가 있어요. 그 앞을 지나면서 오토바이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저는 더욱 죽음을 느끼죠. 죽음의 이유와 결과를 헷갈리지 말아요.     


도시 외곽도 아니고 도심에 묘지가 있다는 것은 한국 문화에서는 낯설어요. 프랑스인들에게 묘지는 친근해서인가요?

그게 아니에요. 파리는 넓지 않아요. 파리는 아주 작은 도시에요. 어딘가에는 묘지를 설치해야 되기 때문에 시내 중심에 위치하게 된 거죠. 더 넓은 도시에 가면 외곽에 위치해있죠. 맨 처음에 페르 라셰즈도 시골에 있었지만 파리가 발전하면서 도시의 중심이 여기까지 따라 온거에요. 그리고 파리에서 나무가 가장 많이 우거진 곳이라 잠시 쉬어가기에 좋죠.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고요에 둘러싸여있고.    


한국 같은 경우 무덤이 국토를 많이 차지해서 납골당을 장려해요. 프랑스에서는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나요?

북한이랑 빨리 땅을 합쳐야겠네요.(웃음) 프랑스도 묘지 부지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프랑스인들은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하지만 넓은 면적의 묘를 쓰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공동묘지에 묻힌답니다. 분양 묘지의 면적은 2제곱미터 정도이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가족묘지가 많죠. 분양 분묘도 영구 매장보다는 10년에서 50년 사이에 시한부 매장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고요. 프랑스에서는 이제 곧 얼마 되지 않아 오래된 묘지들은 다 제거되고 19세기의 모든 추억을 다 잃어버리게 될 테죠. 지속이 아닌 신속이 중요한 시대죠.  





페르 라셰즈는 파리의 또 하나의 유명한 묘지인 몽파르나스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네. 파리의 우안지구와 좌안지구의 차이점을 아시나요? 페르라쉐즈가 있는 우안지구는 상업이 발달했죠. 동사로 말한다면 ‘갖다’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부를 상징하죠. 좌안지구는 동사 ‘알다’로 말할 수 있죠. 여기엔 몽파르나스 묘지가 있는데 사르트르가 묻히고 더욱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의 묘지가 되었어요. 또 이미지 때문에 지식인들은 우안지구를 피하기도 하고요. 묘지마다 약간의 특성이 있답니다.    


한국에서는 유명인사들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 일반인들은 잘 모르죠.

안타깝네요. 19세기에 프랑스에는 페르 라셰즈에 대한 책밖에 없었지만 제가 처음으로 프랑스에 있는 모든 묘지에 대한 책을 냈죠. 그리고 느낀 건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독일, 아일랜드, 영국, 미국 전부 각 도시마다 유명인들 리스트와 그 묘지들을 관리하고 있어요. 한국이 특별한 거죠.  


일반인들이 유명인사의 묘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호기심 때문이죠. 죽은 사람들에게 이 곳은 마침표에요. 죽은 사람들은 이 곳에서 나올 수 없잖아요? 우리처럼 이 곳에서 나올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묘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죽음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은 실존의 시간 외에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현재를 다시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묘지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에요. 죽은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었다면 묘비명도 묘비도 없었겠죠. 우리가 추억하게 하기 위한 거예요.     


사후의 세계를 믿으세요?

음, “죽음 전에 제대로 된 삶이 있었는지?”로 질문을 바꿔도 될까요? 왜냐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게 우선일 것 같네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믿나요?

사회가 많이 비기독교 화되었죠. 교회에 문제가 있어요. 카톨릭교회가 부활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명하는데 성공한 적이 없죠. 성경에서는 다시 사는 날 몸으로 다시 사는 게 아니죠. 하지만 신자가 필요했던 교회는 항상 부활을 육체와 연결시켰어요. 육체를 관에 넣고 관을 지하 묘소 안에 넣고 지하묘소는 묘비 아래 보호되어서 썩고 부패될 몸을 잘 보관하죠. 지금은 전혀 믿지 않아요. 영적으로 가난한 세대이죠.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나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죠. 겁이 많고 준비가 안 되어 있죠. 옛날 세대처럼 사려 깊고 현명하지 못해요. 노화, 건강의 쇠약도 못 받아들이는걸요.  장례식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가족의 무덤에 전보다 더 가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이길 수 있다고 믿죠.

페르 라셰즈가 너무 잘 구성되어 있고 너무 멋있어서 여기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죠.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들과 산책하는 것이에요. 묘지의 매력적인 분위기로 인해 죽음을 잊어버리는 거죠.     





묘지 가이드 하시면서 어떤 보람을 느끼세요?

묘지가이드는 제 활동의 일부에요. 혼자서 더 자주 온답니다. 그저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배우고 책 한권을 읽고 조금이라도 성장하며 꽉 찬 하루를 보내는 것. 그렇게 매일을 살다보면 제 인생은 한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  


좋아하는 묘비명이 있으신가요?

루이스 드 빌모린 Louise de Vilmorin. 그녀의 묘비명은 사람 살려! Au secours! 이 안에 모든 게 담겨있지 않나요?    


혹시 생각해놓으신 묘비명이 있으세요?

길을 건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해요. 묘비명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유언도 마찬가지고 장소도 예정된 게 없답니다. 하지만 노르망디 지역이 될 것 같아요. 이 곳 페르 라셰즈에 있을 수 없어요. 직장이 너무나 생각날 것 같거든요.(웃음)   


그는 장의사도, 묘혈을 파는 인부도, 대리석공도 아니다. 하지만 묘지는 그의 생활의 일부다. 그는 인생살이의 공연이 막을 내린 무대의 뒤편에서 그 무대 뒤를 탐험한다. 죽음에 대한 사유(思惟)이지만 그에게는 유머가 있고 밝음이 있다.     


그들, 그 죽은 자들의 묘비에서 나왔다. 박제가 된 그들의 모습이지만 그들은 나에게 인생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불어넣어줬다. 나는 그 생각들을 제대로 흡입하려는 듯, 숨을 한껏 몰아쉬며 파리의 차가운 공기를 더없이 마셔댔다. 그들에게서 멀어지며 나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그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멘토가 되었다. 파리의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숨을 들이마시듯, 나를 받아들였다.    


죽음은 정말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은 이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이의 가슴에, 머리에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자리를 세내어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이가 남긴 어떤 것들은 산자의 강렬한 욕망이 되었을 것이고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죽은 이가 살아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 말로 영원히 사는 법, 그것이 어쩌면 내가 또 다시 태어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이 시간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시간은 얼마나 정열적이어야 하는가. 이제 산 자가 할 일은 넘치지 않게, 지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생명을 다 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낌없이 불태우는 일이다. 내가 ‘먼저 살아간 이’에게서 얻은 생각의 역사를 고스라니 내 것으로 만들어 소화하고 또 내가 나의 이름으로 생산하는 일이다.     


산 것과 죽은 것에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을 수 있고, 죽었으나 살 수 있다. 죽은 자도 똑같이 도시를 이루고, 길을 만들고, 자리를 차지하고, 도시의 어디엔가 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하다. 살아 있는 자가 또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 그렇게 죽은 자는 도시의 어디엔가, 그리고 내 안의 어디엔가 살고 있다. 그게 바로 묘지의 가이드와 페르 라셰즈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Père-Lachaise

16 Rue du Repos, 75020 Paris

www.pere-lachaise.com





Photo by 황채영

instagram: @almostharm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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