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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예 Feb 20. 2019

평창 동계 올림픽의 추억, 오렌지 군단과 그 사람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네덜란드 선수단이 우리 항공기에 탑승했다. 이름하야 ‘오렌지 군단’. 그 중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황제 스벤 크라머Sven Kramer도 있었다.


“네 남자친구 비즈니스석에서 잘 쉬고 있어.”  

“내 남자친구? 누구?”

“스벤 크라머~”

“하하하 난 관심 없어.”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더치 동료가 던지는 농담이 싫지 않다. 정상급 실력에 잘생긴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완벽한 스벤 오빠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스벤 오빠 덕분인지 비행 내내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올림픽기간 내내 인천을 오가는 KLM항공기 내에는 오렌지색으로 꾸민 네덜란드 응원단, 코치, 스태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한국으로 오는 승무원들도 다른 개인일정은 올 스톱! 자국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평창 주변의 호텔, 교통, 입장권 등을 사전에 예약하느라 난리였다. 네덜란드는 싹쓸이 메달행진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응원도 압승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했을 뿐 아니라 각양각색의 응원도구로 치장한 오렌지색 응원이 날마다 TV화면을 장식했다. 나는 물론 한국 선수를 가장 많이 응원했지만 오렌지색에 취해 네덜란드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월드컵, 올림픽 그리고 매년 열리는 킹스데이와 각종 기념일마다 네덜란드사람들은 모자, 티셔츠, 가발 등 온갖 오렌지색 아이템으로 무장(?)한다. 오렌지색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컬러가 된 것은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16세기의 독립 전쟁에서 기원한다. 당시 독립 전쟁을 이끈 빌럼 1세William Ⅰ는 ‘오라녜Oranje’가문이었고 oranje는 영어의 오렌지orange를 의미한다. 이때부터 오렌지색이 네덜란드를 나타내는 컬러가 되었다고 한다. 오렌지색의 그 산뜻하면서 밝고 경쾌한 이미지가 보는 이로 하여금 네덜란드에 대한 국가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끌어올리는데 한몫 할 것 같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왕가가 블랙이나 그레이란 이름이었다면, 백배는 우중충한 분위기였을 텐데.. 오렌지색은 단순한 색상을 뛰어 넘어 역사와 전통, 국민을 하나되게 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올림픽의 열기가 여전히 뜨거운 어느 날, 암스테르담 크루 센터에서 비행 전에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사전 브리핑 타임이 있었다. 사무장이 비행 일정, 항공기 및 승객 현황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며 말을 이어가다가 ‘오늘 마틴 게릭스Martin Garrix가 탑승합니다.’라고 했다. 모두들 ‘와우’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의 승객 정보를 보았다. “Pax prefers to sleep during flight and not to be disturbed. Pax appreciates privacy. Do not take photos! (승객은 비행 동안 잠을 자기를 선호하며 방해 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승객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사진은 찍지 마세요.)” 도대체 마틴 게릭스가 누구지? 왠지 굉장히 까다로운 승객일 것 같은 느낌이 ‘팍’ 왔다. 유명인사나 항공사 이용 실적이 좋은 승객 등 특별 고객으로 분류된 승객들 중에서도 이런 메모가 기재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승객이 나의 근무 구역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평소 셀러브리티에 무관심한 더치 동료들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마틴 게릭스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EDM(Electronic Dance Music) DJ 스타이고 음악을 들어보면 너도 금방 알게 될 것이라며 호들갑이었다. 사전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모든 크루들은 마틴 게릭스가 평창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승객의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승객들을 맞이하는데 미소년 한 명이 눈에 들어 왔다. 그가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헬로우라고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마틴 게릭스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근무 구역이 아니어서 아쉽게도(?) 비행내내 그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듯 한 그의 아버지와 이 ‘비밀’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런 이벤트에 아들과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특별하고 즐거운 일인지 자랑스러워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마틴의 아버지는 아주 상냥한 사람이라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틴도 아주 마음씨 좋은 청년이 아니겠는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지 않은가? 마틴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어느덧 ‘까다로운 승객’에서 ‘호기심 백배 승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얼마나 스케줄이 많으면 팬들과 교류해야 하는 인기인임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방해 받지 않기를 요구하는 걸까! 나는 마침내 그의 모든 것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올림픽 마지막 날 나는 동료 태희와 함께 강릉에 설치된 ‘홀란드 하이네켄 하우스Holland Heineken House’를 찾았다. 이곳은 네덜란드 올림픽 위원회에서 주관하고 하이네켄에서 운영하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단의 공식하우스이다. 국가 홍보관 중 가장 인기가 있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메달을 딴 선수들과 함께 이곳에서 큰 파티가 열렸다. 간단한 술과 음식은 물론이고 밴드 공연까지 마련되었다.



나는 분명 강릉에 왔는데 네덜란드에 온 듯한 느낌이다. 태희와 나는 하이네켄 생맥주와 네덜란드의 ‘소울푸드’라 불리는 비터발렌Bitterballen을 사들고 테이블에 앉아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폐막식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비터발렌을 먹으며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TV화면에 드디어 마틴 게릭스가 등장했다. 그는 올림픽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주기 위해 볼륨과 키를 컨트롤하고 턴테이블을 현란하게 돌리며 디제잉 실력을 마음껏 뽐낸다. 사실, 나는 EDM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 요란한 전자음악에 네덜란드를 연계해본 적은 전혀 없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들판에 피어있는 튤립과 여유롭게 풀을 뜯는 젖소가 떠오르는 네덜란드가 EDM 강국이라니! 마틴 게릭스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EDM DJ 스타들을 줄줄이 배출해내고 세계적인 EDM 축제의 본거지라니! 그런 반전이 마틴 게릭스와 네덜란드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마틴의 연주가 점점 고조되면서 파티장의 분위기도 뜨거워진다. 도저히 못 앉아 있겠어! 들썩들썩! 그야말로 모두가 즐기는 축제의 현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에 유난히 오렌지색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사진 출처=구글

          

(커버 이미지=2018 평창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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