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예 Feb 13. 2019

유럽의 한복판에서 항일을 외치다_이준 열사 기념관

KLM에 입사한 후 네덜란드를 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알게 된 도시가 헤이그The Hague이다. 내가 근무하는 노선이 인천-암스테르담 노선이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주로 암스테르담에 머무는데, 어느 날 바람 좀 쐴 겸 암스테르담 근교인 헤이그 여행을 계획했다. 헤이그는 암스테르담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네덜란드 왕가의 공식관저인 노르트에인더 궁전Noordeinde Palace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의 정치와 행정기관이 모여있는 행정수도이다. 헤이그는 영문 이름이고, 네덜란드어로는 덴하그Den haag라고 한다.



동료인 동욱오빠와 함께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헤이그까지 직통으로 가는 SPR(Sprinter의 약자)열차를 탔다. 한 시간 정도 달린 기차가 헤이그 센트럴역에 닿았다.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니 우리의 목적지인 이준 열사 기념관에 도착했다. 건물 전면에 ‘YI JUN PEACE MUSEUM’이라는 영문자가 크게 표기되어 있고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어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타국에서 만나는 태극기는 뭉클하다. 이곳은 당시 드 용De Jong이라는 호텔이 있었던 곳으로,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었던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알리고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종황제가 1907년 2차 만국평화회의Conférence de la paix에 파견했던,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이준(49세),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38세),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한국공사관 서기관 이위종(21세), 세 분의 열사가 기거했던 곳이며, 이준 열사가 순국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입구에 있는 벨을 누르니 안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신사분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신 이 분은 이곳 기념관을 운영하시는 이기항 이준아카데미재단 이사장님이셨다. 이기항 이사장님과 아내인 송창주 관장님은 이 기념관을 건립하신 분들이다. 관람료 5유로를 지불한 후 관람에 대해 간단히 안내를 받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기념관이지만 이 곳에는 헤이그 특사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헤이그 특사가 파견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헤이그 특사 세 사람의 이동과정 그리고 헤이그에서의 활동을 설명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그 당시의 현장에 있던 자료들로 불어와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고 한국인 방문객을 위하여 주요 내용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승리감에 도취해 기념촬영을 한 일제 고위 관료들의 사진,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만국평화회의에 세 명의 열사를 파견한 고종황제의 사진 등등.. 우리는 어찌 그리 힘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준 열사는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특사가 되어 1907년 4월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한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고 시베리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위종이 합류하여 64일 만인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지금 여행이 이렇게 보편화 된 시대에도 외국에 나가는 일은 막막하고 겁나는 일인데,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심적, 물리적 거리가 멀었을 그 때는 얼마나 더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꺼져가는 조국을 살리려는 애국충정이 있었기에, 그 분들은 이 머나먼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단숨에 달려 오시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의 기관지인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를 통해 을사늑약은 효력이 전혀 없다며 3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승낙 없이 행동을 취했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항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1907년 6월 30일자 평화회의보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


첫 번째 전시관과 이어진 그 다음 전시관은 당시 이준 열사가 머물던 방이었다. 그의 사진과 옷가지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단정하면서 정갈한 방안 분위기와 어울려, 지금이라도 이준 열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실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방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셨습니다!”라고 출입문 앞에 적혀있었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그의 숭고한 뜻과 정신에 울컥했다. 그러니까 이 방이 독립운동의 발원지이지 않을까? 이준 열사는 회의 참석이 거부된 후인 7월 14일 오후 7시에 갑자기 순국한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화회의보에 실린 이위종의 호소문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이준은 온 나라 전체가 신임할 수 있었던 애국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심 끝에 죽었으므로 애국자이자 순교자라 하겠습니다. 그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지만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겪고 있는 조국의 불행과 잔학한 모욕이 그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의 애국심을 자극했습니다. 죽기 며칠 전부터 그는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1907년 7월 20일자 평화회의보, 이위종의 ‘기독교국들을 향한 한국인들의 호소’ 중에서)



관람객이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기항 이사장님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나: 선생님은 어떻게 기념관을 설립하시게 된 거에요? 이준 열사랑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 건가요?


이기항 이사장: 내가 네덜란드에 산지 46년이 됐어요. 1972년도에 무역회사의 회사원으로 파견돼서 왔지. 그러던 어느 날 화란 역사학자가 신문에 ‘이준 열사가 돌아간 집이 있다! 어느 집에서 묵다가 죽었다!’라고 기사를 쓴 거야. 그래서 ‘가봐야지!’ 마음을 먹고 왔더니 집이 쓰러질라그래. 재개발돼서 없어지고 허물어지면 우리 역사가 없어지잖아? 그렇지 않아? 그럼 안 된다고 생각했지. 1층엔 헤이그에서 제일 큰 당구장이 있었고 위에는 무주택자들이 득실거렸지. 천장에 비가 새고 창문은 찌그러지고.. 쓰레기, 찌꺼기도 가득하고. 뭐 어떡해? 내가 가난하진 않았어. 그래서 이 집을 자비로 사고 수리하고 자료 하나하나 수집하고 자그마치 5년이 걸렸단 말이지. 3년은 무주택자들을 내보내는데 시간이 걸렸어. 이 사람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안 나가려고 했지. 나도 변호사를 댔어. 그리고 헤이그시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해야 된다는 청원을 냈고 헤이그시가 청원을 받아들여서 재개발지에서 해제를 시켜줬어.


나: 이준 열사 기념관이 탄생하게 된데에 이런 대단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니 몰랐어요! 왜 안 알려져 있는 거죠? 


이기항 이사장: 무식하구나? 껄껄껄… KBS 해외동포상도 타고 KBS 다큐멘터리에도 방영됐는걸.


나: 헉 그랬구나. 제가 몰랐군요. 이준 열사의 헤이그에서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기항 이사장: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이준 열사의 죽음은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의 한 알의 밀알이라고 할 수 있지. 일본의 식민지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여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속화됐으니까.


나: 송혜교가 기부한 게 있네요? 


이기항 이사장: 난 송혜교가 누군지도 몰랐어.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라고 젊고 발랄한 사람이 있는데 근데 여기 와서 "뭐 애로가 있느냐?"고 하길래, 이준 열사 동상은 있는데 세 분의 조형물이 없다고 했더니, "아 그래요? 그럼 제가 가서 한 번 알아 볼게요." 그러는 거야. 근데 몇 달 후에 서경덕 교수한테서 연락이 온 게 아니라 철공소에서 전화가 왔어. "다 만들었어요."하면서 비행기로 실어 왔어. 송혜교가 돈을 댔대. 아이디어는 서경덕 교수가 냈고. 송혜교가 좋은 일 많이 하나 봐. 얼굴만 예쁜 게 아니고 마음씨도 예쁘고 훌륭해. 저거 돈이 얼마짜리야? 엄청 들었을 거야. 송혜교가 저거 만들어 보냈어. 지금 어디 갈 거여?


나: 저희 더 리더잘De Ridderzaal에 가려고요!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처음 만나더라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방 친숙해지긴 하지만, 입담이 참 구수하신 이사장님과는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사장님께서 문 앞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360년이 넘은 건물을 관리하는 것부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박물관의 의미를 알리기 위한 작업까지 손이 필요한 곳이 한 두 개가 아닐 텐데. 이 두 분의 노력이 없었다면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에서 울분을 토하며 돌아가신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 두 분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전 08화 조선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_하멜 박물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