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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예 Jan 30.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_안네의 집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1929-2945). 그녀의 집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Edith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1933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지만 1941년 독일은 네덜란드마저 점령한다. 안네의 가족은 아버지가 경영하던 식품회사 건물 뒤의 별채에 숨는다. (안네의 아버지는 독일에서는 은행에서 일했지만 네덜란드 이주 후 식품회사를 운영)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이들은 이 곳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회사 직원들이 가져다 주는 식량에 의존해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1944년 8월 4일 이 은신처가 발각되고 안네의 온 가족은 독일의 아우슈비츠로 보내진다. 1945년 3월 안네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 이송됐다가 언니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둔다. 16세의 어린 나이였다.



안네의 집은 백퍼센트 예약제이다. 온라인 예매만 가능한데 일찌감치 매진이 되는 터라 한 달 이전 예약이 필수이다.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서가에서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바짝 공부(?)를 했다. 안네에게 일기장은 단순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인격화 시켜 ‘키티’라고 부르며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담담하게 하루하루의 일상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1942년의 어느 여름날, 줄기차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안네 가족이 암스테르담의 메르베데 광장Merwedeplein의 집을 떠나 현재의 안네의 집으로 알려진 은신처로 걸어왔다. 이 은신처는 당시 안네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식품회사의 일부를 개조한 것인데, 안네의 아버지는 메르베데의 집을 떠나기 몇 달 전부터 건물 내부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위급한 순간 가족이 숨어서 살 수 있도록 내부 공간을 재배치한 것이다. 햇살이 밝고 아주 따뜻한 4월의 어느 날 그 운명의 길을 나도 걸었다. 눈에 띌 만큼 특별한 건 없었다. 앞에 운하가 흐르는 평범한 4층 건물이었다. 표를 확인하고 입장할 때 짐 검사를 하는데 이 공간으로 들어가고 나가기 위해 또 살아가기 위해 삼엄한 시간을 보냈을 그들을 떠올리는 듯 다들 아무 말 없이 검색대를 지난다. 안네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불현듯 안네가 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안네의 집은 건물 2층부터 시작된다. 2층에는 안네에 대한 짧은 영상, 안네의 가족사진과 친구들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안네는 깜찍하고 귀여운 재롱둥이, 천진난만한 말괄량이, 지혜롭고 총명한 눈빛의 해맑은 소녀로 자라왔다. 안네의 모습 어디에도 경직되고 위축된 모습, 두려움과 어둠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시물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사진 촬영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어서 너무도 아쉬웠다. 3층에는 은신처에 있는 안네의 가족을 외부에서 도와준 조력자들 (안네 아빠 회사의 직원들이 대부분)의 사진과 설명이 게시되어 있고 생전의 그들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놓인 회전식 책장을 밀고 들어가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밀공간이 나왔다. 이 공간이 진짜 은신처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안네의 가족 4명 (안네의 아빠, 엄마, 언니 마르고와 안네)과 안네 아빠의 친구 판 단씨Van Daan 가족 3명 (판 단씨 부부와 외아들 페터Peter van Daan), 나중에 합류한 치과의사 뒤셀씨Albert Dussel. 총 8명이 숨어 살았다. 책을 읽으며 상상만했던 책장모양 회전문을 실제로 봤을 때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이 실팍한 책장 너머에 이처럼 많은 방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상상속의 안네의 집은 허리도 펼 수 없을 만큼 작은 다락방 같은 느낌이었는데 전혀 의외의 모습이었다. 집다운 집의 형태가 갖춰져 있었다. 낡았지만 벽지도 고풍스럽고 가구나 변기도 고급스러웠다. 물론 안네 가족이 사용했던 것들을 그대로 보관해온 것이다. 프랑크 부부와 안네의 언니 마르고의 방을 지나 안네와 룸메이트인 뒤셀 아저씨의 방에 다다랐다. 벽에 신문에서 오린듯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 왔다. 벽지에 있는 낙서라든지 포스터를 붙이는 등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비교적 넓은 안네의 집이지만, 관람객이 많다 보니 일렬로 줄을 지어 천천히 가면서 보게 되는데 다른 박물관이나 관광지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관람이 이루어졌다. 내 앞에 가던 어떤 할아버지는 거동이 약간 불편한지 쌕쌕 숨을 몰아 쉬면서도, 감정적으로 속안에 끓어오르는 것을 절제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었다. 안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표시를 새겨 넣은 문설주도 보였다. 그 밖에 네덜란드어 말을 배우려는 책, 네덜란드인이면서 신실한 조력자 미피Miep Gies한테 부탁했던 쇼핑리스트, 1942년 7월 18일 메뉴를 적어놓은 종이, 안네의 첫사랑 페터가 16살 때 받은 보드게임과 라이터 선물도 있었다. 비록 은신처였지만 숨어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 치하 하에서 유대인의 삶이란 굳이 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지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에 거부당했던 삶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사는게 힘든 시기에 안네가 꿈을 잃지 않은 건 기적이다. 안네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재치 있게 대답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고 떠들어댄다. 전력을 너무 많이 써서 절약하지 않으면 전기가 끊어질 우려가 있는데 전등 없이 지내는 생활을 상상하며 멋지지 않냐고 반문한다. 어두워진 시간에 여러 가지 바보스런 일을 생각해낸다. 수수께끼 놀이, 체조, 영어와 불어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즉석에서 독서 토론회를 열기도 한다. 아주 유별난 임대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멋진 은신처라는 표현을 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어떤 믿음이 안네에게는 있던 걸까?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16세 소녀가 품었던 감사와 사랑과, 행복의 단어들이 까마득한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별처럼 내게 다가 온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서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이 세상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나의 마음은 환희로 넘칩니다. 이렇게 은신처 생활을 할 수 있고 더욱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랑, 미래, 행복 등 이 세상을 의미 있게 하는 모든 것, 그 외의 모든 것,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을 찾을 생각만 있다면 바로 그 만큼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해줍니다. 그만한 용기와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코 불행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 안네의 일기 」(문학사상사), p290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오랫동안 망설임 끝에,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그에 따라 안네의 일기는 1947년 6월 25일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책으로 출판되었다. 오토 프랑크는 자신의 여생을 박해와 편견과 싸우는데 바치기로 결심하고 비밀의 은신처가 들어있는 건물을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그리고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안네의 일기를 읽고 편지를 보내온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나무가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 햇빛이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하고 하늘이 저토록 푸르면, 그러면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던 안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망이 생긴다. 희망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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