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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예 Jan 23. 2019

세상에서 제일 큰 생일파티_킹스데이

“담당자 분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인 크루 레아Lea(저자의 영문이름)이고 사원번호는 KLxxxxx입니다. 4월 26일 암스테르담행 비행을 신청합니다. 킹스데이King’s day에 꼭 참여하고 싶거든요. 더치 크루와 승객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꼭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레아씨,

이 곳 암스테르담에서 킹스데이를 즐기기 위한 귀하의 4월 26일 비행 신청을 접수했습니다. 비행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킹스데이 준비 잘 하세요!”


정확히 1월 25일 Planning & Assignment 부서 담당자와 주고 받은 메일이다. 3개월이나 미리 신청한 만큼 그 날을 꼭 암스테르담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담당자의 당부대로 킹스데이를 손꼽아 기다리며 준비를 조금씩 해나갔다.


네덜란드어로 꼬닝스다흐Koningsdag라고도 불리는 이 날은 네덜란드 최대 국경일로 네덜란드 국왕의 생일을 기념해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이 축제는 1885년 8월 31일 빌헬미나Wilhelmina여왕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처음 열리면서 퀸스데이Queen’s Day로 명명되었다. 2013년까지는 퀸스데이였으나 120여 년 만에 빌렘 알렉산더Willem-Alexander왕이 왕위를 승계하면서 이름은 킹스데이로, 날짜는 왕의 실제 생일인 4월 27일로 변경됐다. 알렉산더 국왕에게는 세 딸이 있으니 이후에는 다시 퀸스데이Queen’s Day로 이름이 바뀔 것 같다. 왕실 가 사람들은 내각에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국민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 다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고 있는데 알렉산더 왕은 KLM의 단거리 노선의 부기장이기도 하다. 기장 입장에서는 부기장인데 왕이라 애매할 것 같고 승객들은 조종석에서 왕을 만나게 되면 엄청 신기할 것 같다.


이 축제는 단순히 왕실 행사가 아니라 네덜란드 온 국민의 축제다. 우리가 빨간 옷을 입고 온 거리를 헤매며 대한민국을 외치듯이 오렌지 물결로 네덜란드 전체가 뒤 덮인다. 각종 사진과 영상을 참고해보니 오렌지색으로 무어라도 걸쳐야겠다. 전신을 오렌지로 도배해도 좋겠다. 그게 정상이다. 일단 마음에 드는 오렌지 브이넥 스웨터를 장만해두었다.



내가 킹스데이에 가장 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보트에서 놀기이다. 수천 개의 밝게 장식 된 보트가 좁은 암스테르담 운하를 가득 메운다. 나의 ‘보트에서 놀기’는 우연한 기회에 행운처럼 다가왔다. 킹스데이 3주 전 비행에서 그와 조우했다. 그의 이름은 그 유명한 클라스 히벌다Klaas Hilverda. 머리 희끗한 50대 사무장이지만 부업으로 디제이 일을 한다. 스페인의 이비자 섬Ibiza Island의 클럽에서 한 달에 한 번 연주하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클럽 이스케이프Escape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가 킹스데이에 보트에서 디제잉 파티를 연단다. 그가 즉석에서 나를 초대한다며 최고 환영의 몸짓을 보였다. 그는 그 날 나는 물론이고 같이 비행할 한국인 크루 두 명도 초대해줬다. 그가 “나는 일년 중 그 날만 기다려. 그 날은 내 속옷도 오렌지 색이지. It’s gonna be great babies.”라며 느끼한(?) 윙크 한방을 날린다. 회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이후 비행에서 클라스와의 킹스데이 계획을 말하면 아줌마 크루들은 깔깔거리면서 클라스는 예쁜 남자라며 안부 전해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드디어 킹스데이가 밝았다. 호텔 조식에서 빵과 초콜릿 케이크 등도 산뜻한 오렌지색으로 바뀌어 있다. 10시 45분까지 성 니콜라스 바실리카 성당Basiliek van de H. Nicolaas 앞에서 클라스를 만나기로 했다. 초대받은 세 명 중 한 명은 몸이 좋지 않아 문선언니와 나만 가게 되었다. 들뜬 두 여자가 발걸음도 가볍게 호텔에서 나오니 국기를 게양한 몇몇 집 덕분에 국경일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암스테르담 사람들 모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벼룩시장과 각종 음식을 파는 장터 사이사이 길들은 북적거리는 인파로 발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암스테르담은 좁았고, 온 동네가 그랬다.



‘빅 블랙’ 보트에 오르는 가슴 떨리는 순간! 육지에게 잠시 안녕을 고하며 운하 위의 클라스 선장의 보트 안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마음이 바람을 맞은 돛대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다. 보트가 출항하자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출렁이는 강물에 서서히 몸을 맡겼다. 배의 앞머리에 몸을 기대고 앉자 상쾌한 강바람이 머리카락을 뒤흔든다. 뭍과 멀어질수록 암스테르담 운하의 낭만이 짙게 피어 오른다. 너른 강 한가운데서 마시는 맥주는 그야말로 꿀맛. 강바람에 메마른 목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초반엔 음악의 리듬에 살짝살짝 웨이브를 탔다.


드디어 클라스 선장의 연주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고조되고 어깨춤이 절로 난다. 50대의 디제이인지라 혹여 흘러간 옛 음악(?)에만 머무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볼륨과 키를 컨트롤하며 턴테이블을 현란하게 돌리는 클라스! DJ 사무장, 저 멋진 분이 나의 상사이시다~!



출발한지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자 중심가에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보트 퍼레이드가 장관이다. 어느새 운하에 가득 찬 보트행렬이 끝없이 펼쳐질 정도로 배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하늘엔 오렌지색 색종이가 날렸다. 너나 할 것 없이 그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서로를 껴안고 축제를 즐겼다. 운하는 오렌지 빛으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보트에서 온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파노라마로 감상한 암스테르담은 지금까지 본 것들 중 으뜸이었다.


현란한 춤을 추는 데이빗에게서 나는 한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춤의 신이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독일에서 온 데이빗, 크리스토프, 이셤, 스페인에서 온 루이, 로레나, 프랑스 사람 씨릴까지 우린 알게 된지 30분도 안됐지만 이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루이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로레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되었다. 여행은 사람을 통하게 한다. 갑자기 바로 내 앞에 섰던 두 남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두 눈빛에서 에로틱한 불꽃이 튀었다. 그러더니 두 남자는 서로 팔을 옭아매고 키스의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 아, 이 사람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나는 그만 죄지은 사람마냥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아무튼 우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어울리며 들떠있었다. 우리 그만 좀 웃자. 왜 이렇게 웃었었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운하 위에서 쏜살같이 흘려버린 시간들. 4시간을 보트에서 보내고 내려왔다.



킹스데이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큰 생일파티가 아닐까? 암스테르담은 킹스데이에 25만명 정도의 외부인파가 몰려 가끔씩 ‘암스테르담 수용인원 초과, 암스테르담에 오지 마시오’라는 재해 문자를 받기도 한다니 정말 세상에서 제일 큰 생일파티가 맞나 보다. 이 날은 왕실 가족이 암스테르담을 떠나 다른 지방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진짜 생일의 주인공인 알렉산더 왕은 51번째 생일을 맞아 올해는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흐로닝언Groningen을 방문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흐로닝언을 방문해 시민들을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했고 시민들은 왕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은 원래대로 되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내년의 ‘킹스데이’를 기다릴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사무장의 쪽지가 도착해있다.


“Sweeties I was so happy to see you both and even more happy that you had a great time. Some things in life are meant to be and Oh Yeah you Girls were predestined to be on that boat. Be sure to be back next year for Kingsday or someday soon on my boat. Thanks for all the Joy and laughter.”

“둘을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너희가 좋은 시간을 보낸 건 더 행복했고. 인생에서 어떤 건 꼭 일어나야만 하지. 오예! 너희들은 그 보트에 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내년 킹스데이 때 꼭 돌아와야 해 아니면 조만간 다시 내 보트에 타러 와. 모든 기쁨과 웃음에 고마움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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