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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45

안녕히 계세요




조금 오래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늦은 오전까지 침대 위에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긴장 반 설렘 반이었던 마음 때문에 남자는 맞춰놓았던 알람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남들에게는 그저 보통의 화요일과 같았겠지만 그 예외 중 하나였던 그는 이미 다 떨어져 나간 잠결에 괜스레 이미 다 확인한 스마트폰 메일함과 유튜브 영상들을 한동안 반복적으로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더디게 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냥 몸이나 움직이자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샤워부터 끝낸 남자는 며칠은 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었던 인스턴트커피 한 잔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평소에는 창가에 앉아 바깥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호스트의 15살 된 강아지도 눈치를 챘는지 약간 멍하게 앉아있던 그의 발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미 짐이 다 담긴 상태로 먼저 문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캐리어 하나가 단서가 된 듯했다. 어차피 못 알아들을게 뻔했지만 이 날만큼은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몇 번 정도 세월에 의해 기운이 조금 빠진 검은 털들을 쓰다듬은 그는 마저 커피를 다 들이켜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남아있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1년 동안 입었던 여벌옷들과 종이서류들, 그리고 가져와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마스크 묶음들과 같은 자잘한 것들이 전부였다. 







작년 여름시즌에 파티용으로 잠깐 입었던 트로피컬 셔츠와 몇몇 해진 옷들을 봉투에 담아 헌옷수거함에 넣으러 가기 위해 신발장 앞에 선 남자는 이곳에 오자마자 구매해서 신고 다녔던 트레킹화를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해진 것과 구멍 난 것은 기본이요, 밑창은 이미 다 닳아서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한국에 가지고 가서 종종 신으려 했던 소망은 물거품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이만큼이나 망가질 만큼 후회 없이 많은 곳을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큰 고민 없이 같이 봉투에 담아 집을 나섰다. 



바로 앞 작은 교회 건물 옆에 있던 수거함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서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아직 거리에 군데군데 남아있던 눈과는 별개로 따뜻했던 날씨가 그의 마음을 건드렸고,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남자는 매일같이 다녔던 길을 마지막으로 걸으며 시원섭섭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내 보고자 했다. 한창 추울 때는 그렇게나 멀어 보였던 이 경로가 이 날따라 더욱 가깝게 느껴졌던 것에는 현재의 심리상태가 매우 크게 작용한 듯 보였다. 역 바로 앞에 트레이드마크처럼 세워져 있던 기다란 폐 타워도 이제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임을 알았기에 가지고 나왔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볍게 한 장을 담고서 다시 발걸음을 돌린 그였다. 



노트북을 담을 백팩만을 열어둔 채로 하염없이 앉아 유튜브 영상들을 돌려보다 보니 햇빛은 빠르게 하늘 아래로 내려갔고, 저녁 시간에 가까워졌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새벽 동안 이것저것 입에 넣을 것이 분명해서 냉장고에 남아있던 아몬드 우유와 오트밀을 함께 섞어 이 집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으려 하는 동시에 그의 오랜 룸메이트였던 가나에서 온 친구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섰다.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나 보였지만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바로 식탁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던 고마운 형. 동시에 남자도 생각이 떠올라 방에 남아있던 생필품들을 곧장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내가 쓰다가 남은 건데 너에게 다 주고 갈게. 별 거 아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 



"오 아냐. 나야 너무 고맙지. 어차피 다 돈이잖아 하하. 이따가 집 떠날 때 다시 나와서 인사할게. 밥 마저 계속 먹어." 




모든 손님을 다 받고 나서 늦은 저녁을 먹으러 올라온 호스트도 그에게 모든 준비가 다 됐는지 물었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괜찮다며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그녀의 호의 덕에 그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이따가 시간에 맞춰서 거실로 나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출발하기까지 2시간 정도가 남은 시간.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어서 오라며 메신저로 연락을 보내왔고, 그는 sns 계정에 그동안 모두 고마웠다는 인사가 담긴 포스팅을 올리고 나서 멈춰있던 영화 하이라이트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패딩 재킷을 걸치고 방에 불을 끈 뒤에 호스트와 함께 차고와 연결되어 있던 집 뒷문으로 나선 남자는 공항으로 가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계속 고마웠다는 말을 연속적으로 뱉어냈다. 원래도 톤이 조금 높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간 듯한 그녀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차량 안을 채웠고, 20분 정도 걸려 그들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공항 게이트 앞에 주차를 하고 마지막 포옹을 했다. 




"울지 마세요. 또 다른 좋은 사람이 올 거예요. 진심으로 너무 고마웠어요." 



"너와 1년 동안 함께 해서 너무 행복했단다. 건강하고 계속 연락할게. 조심히 가렴." 




본인의 눈에도 맺힌 이슬을 보이기 싫어 캐리어 손잡이 2개를 양손에 잡고 부리나케 공항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호스트를 일부러 모른 체하고 항공사 체크인 부스로 향했다. 추가로 결제할 것과 함께 2장의 실물 티켓을 건네받은 그는 곧바로 검문수색대를 넘어 몇 시간 뒤 몸을 실을 비행기 게이트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일찍 왔던 탓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창문 밖으로 바삐 움직이는 라이트와 카고 트럭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모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드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이런 고민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는 단칼에 이어지려 하는 잡념들을 끊고서 고개를 뒤로 젖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이방인의 일기: 캐나다 캘거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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