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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41

Goodbye.2023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평범한 일상에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추가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약간의 의미부여와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들어가서 그랬는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그의 기분의 온도도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저녁에 있을 친구네 집에서의 송년 파티에 맞추어 남자는 옷장 뒤편에 한동안 박혀있던 카디건과 면바지를 몸에 걸쳤다. 밤부터 비 소식이 있었지만 설마 진짜 내리겠냐는 약간은 안일한 마음에 먼지 쌓인 우산을 두고 방 문을 닫은 그 임에도 늘 그렇듯 카메라가 들어가 있던 가방만은 빠지지 않고 몸에 감싸져 있었다.



벌써 다운타운에 나와있다는 또 다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역으로 걸어가는 중에도 연말의 시원섭섭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 애써 생각의 방향을 돌려봤지만, 산책 중이던 이웃들과의 인사가 "Hello"에서 "Happy new year"로 바뀌어 귀에 들어올 때마다 위치는 빠르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겨우 며칠 새 달라져 버린 본인의 컬러에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그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이런 모먼트도 결국 내일 아침을 맞이하면서부터 점차 사라질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런 본인의 내적 소용돌이와는 반대로 남들에게만큼은 네개의 숫자 중 맨 뒷자리 번호가 바뀌는 것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던 그였다.







"오 이런.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를 만났네. 그것도 2명이나!"



"이 친구는 한국에서 왔는데 낚시꾼처럼 사진을 찍어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사냥꾼처럼 뛰어다니고요."



"좋은 듀오네요. 우린 이제 막 웨딩 파티에 가려고 밖으로 나온 건데, 카메라가 멋져 보였어요."



"댁의 아드님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야 못하죠. 혹시 괜찮다면 몇 장 찍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우리 둘 모두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이렇게 만난 게 참 신기하네요."




덥수룩한 수염과 갈색 비니를 둘러쓴 채로 남자와 같이 거리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이 친구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과 방식이 비슷했던 덕분에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이방인의 눈을 가지고 있던 남자와 달리 이 도시에 너무나 익숙해져 만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도시라고 소리쳤던 그와 함께 이 날도 일상의 특이한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두 사람. 날이 날인지라 상당히 소란스러웠던 도심지와 더불어 처음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도 그들에게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뷰파인더 안쪽 작은 사각형 프레임에 표정을 지어 주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약속 장소에서 다시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친구와 헤어진 남자는 홀로 커피를 한 잔 새로 집어 들고 시청 역 근처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몇 시간 전에도 사람들로 길게 늘어서 있던 스케이트 렌탈 샵 앞은 여전히 붐볐고, 바로 옆 얼음판에는 이미 그 인원의 배가 되는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커다란 트리 중심을 돌고 있었다. 잔뜩 차려놓았으니 배 굶고 오라는 집주인의 말에 따라 2시간 남짓 남아있던 시간 동안 허기진 속과 함께 주위를 맴돌며 몇 장의 사진들을 더하고 나서 다시 열차 칸에 몸을 실은 남자는 곧이어 만나기로 했던 곳에서 친구, 그리고 그의 와이프와 함께 조금 떨어져 있던 한 주택가에 다다랐다.



그들이 문을 노크하자 이미 집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먼저 도착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각자 원하는 음료와 주전부리들을 접시에 담은 뒤 다 같이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모양새가 마치 드라마 '프렌즈'와 매우 유사했다. 항상 자신에게 질문이 날아올 때마다 얘네들이 정말 이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던진 건지 고민을 종종 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이 날, 이 시간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받아들이려 했다. 남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만큼 많이 가까워졌고, 이곳을 곧 떠나더라도 이들은 어떻게든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종의 유대감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쌓였다는 판단 하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너 진짜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데.."



"1시간도 안 남았는데 까짓 거 시도해 보지 뭐. 오늘 너무 고마웠어. 새해 복 많이 받고 곧 또 보자고."




11시가 조금 넘어 다운타운 옆 공원에서 다시 혼자가 된 그.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감당이 될 것 같다 싶어 결국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폭죽이 쏘아 올려지는 것까지 보기로 결심한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천장이 막혀있던 다리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가 이 자리를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직접적인 촬영보다는 혼자서 열심히 달려왔던 2023년을 차분히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월별로 찍은 사진들을 가끔씩 돌이켜 볼 때마다 그 당시의 이야기들이 전부 생각나는 것을 보았을 때 이곳에서의 그의 매 순간들은 모두 진심이었으리라. 한국에서 세워왔던 모든 목표들을 이루었던 것 또한 중간중간 윤활유 역할을 톡톡이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과거와는 달리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발전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실력 없는 사람은 슬럼프도 없다."라는 모 야구감독의 말이 자꾸 본인에 대한 말 같아 계속 곱씹으며 몸을 움직였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어서 내년에 대한 계획까지 고민하던 중 강가 위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고, 짧지만 강렬했던 10분 동안 그는 사람들과 같이 한편에 서서 구경을 끝내고 부리나케 장소를 벗어났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게 심상치 않아 결국 한 빌딩 아래에서 택시를 부른 그는 뒷좌석에 몸을 기대자마자 기사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다. 중동 대륙 쪽에서 넘어온 듯 보였던 중년은 남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에게 새해 목표를 세웠냐고 물었다. 조금 피곤했지만 남자는 최대한 또박또박 힘을 주어 그에게 답을 건넸다.




"나는 사진을 찍을 거고, 기회가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날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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