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42

라스트 댄스




"형님! 12일에 공연 있어요. 그때 갈 수 있어요?"



"어... 그러니까 네 말은 저번처럼 이때 와서 사진 찍어줄 수 있냐는 말인 거지?"



"Yes!"



"별일 없으면 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나한테 형님이라고 하지 마! 네가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어도 우린 지금 캘거리에 있으니까! 들을 때마다 소름 돋는다 ㅠㅠ"



"Haha kk. See u then!"




새해를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캘거리의 기온은 곧바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영하 15도라는 숫자에 감사해하며 얼어붙은 집 문짝을 간신이 열어 외출을 해야 할 만큼 도시의 손길이 뻗어있는 모든 곳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전력이 부족하니 생활하는 데 최대한 절전을 부탁한다는 알람 문자와, 다음 달 날아올 전기세 고지서를 미리 걱정하며 들려오는 여러 한숨 소리들은 보너스. 그가 처음 공항에서 내렸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세를 지닌 캘거리의 '진짜' 겨울은 이제 정말 시작된 듯 보였다. 



약속 당일. 해가 완전히 지고서야 나갈 채비를 한 남자는 100% 충전된 배터리 2개와 카메라를 목토시로 둘러싼 뒤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필이면 또 이 주에 가장 낮은 기온을 가리키는 날에 외출을 해야 했던 터라 본인 스스로와 장비 보호에 만전을 기했던 그. 추위에 벌벌 떨며 장소에 도착했는데 텅텅 빈 배터리들을 마주하는 것만큼 속상한 상황도 없기에 그는 두어 번 정도 더 가방 버클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나서야 방 천장에 붙어있던 형광등의 불을 끌 수 있었다. 







도착해서 사운드 체크를 하고 있으니 2층으로 올라오라는 'Buddy'와 '동생'의 경계에 걸쳐있던 한국계 캐나다인 친구의 문자를 받자마자 남자는 바로 근처에서 마시고 있던 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루리하고 한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팔과 반바지를 몸에 걸친 채로 캘거리에서 몇 안 되는 이 가게의 네온사인 간판을 찍으면서 안에 들어가 볼 일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던 게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선 그는, 곧이어 손님 안내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서버에게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홀로 나무 계단을 타고 위쪽으로 향했다. 



그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스테이지에서 기타를 메고 있던 친구는 손을 흔들었고, 작업이 마무리되자마자 무대에서 내려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두어 달 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지에서 우연히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만남은 늘 생각 이상의 친근감을 빠르게 몸에 전달했다. 동갑내기였던 다른 한국계 친구와는 달리, 이 뮤지션은 어느 정도 한국어에 능숙했던 덕에 더욱 그 발화의 시기가 앞당겨졌던 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법했다. 자신이 편하게 느끼는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뱉어내어준 덕분에 남자 또한 이곳에 넘어와서 타인과 가장 많이 본인의 제1언어로 대화를 하며 잠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잊지 않고 얼어붙은 카메라와 배터리를 녹이기 위해 양손에 목토시를 올려 몸에 품고 있었던 것을 보면,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음에도 마음속 한편에 가지고 있던, 자칫 사그라들 수 있었던 기록에 대한 열망이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듯했다.







비어있던 테이블들이 빽빽이 들어찰 때까지 흘러나왔던 2시간의 공연에서 그는 무대 주변을 쉬지 않고 어슬렁거렸다. 전부 다 이전에 만났던 사이여서 그들 또한 남자가 자신들에게 가까이 다가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직전에 극장에서 찍었던 때보다 조명이 부족했던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이들과의 첫 교류 이후로 은연중에 남자의 사진에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는 게 사람들로부터 느껴졌던 탓에 설렁설렁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수천 번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극복하고 한 번의 "와!"라는 탄성이 보자마자 나올 만한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일상이었던 그의 1년의 발자취는 누구의 말마따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처럼 그의 옆에 붙어있었다. 



영하 30도가 넘는 날씨에도 찾아와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막을 내린 그들은 지인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서둘러 전하고 부리나케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또한 한편에 벗어놓았던 옷가지들을 다시 걸치고 다 같이 술집을 빠져나와서 친구를 도와 짐을 실은 뒤 함께 차에 올랐다.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몇몇 차량들은 배터리가 방전돼서 도움의 손길을 구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지만, 다행히도 친구의 차량은 그들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배기음을 뿜어냈다. 




"나 5월에 한국 갈 것 같은데, 혹시 그때 볼 수 있어요?"



"5월? 그때는 한국에 있을 것 같은데요? 오면 연락해요. 주말에는 서울로 자주 나가니까."



"오 진짜요? 옛날에 몇 번 갔었는데 지금 잘 기억 안 나요. 가면 또 멋있는 사진 찍어주세요."



"누가 봐도 관광 온 사람처럼 찍어줄게 ㅋㅋ"





그렇게 15분 정도의 동행 속에서 한국형 R&B 음악과 함께 아까와 같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남자의 집에 도착했고, 그는 가기 전에 한식당에서 밥 한 끼 하자는 진부한 문장으로 작별을 건네며 차량의 문을 닫았다. 얼마 안 가 대문 앞에서 열쇠를 뒤적거리고 있던 남자에게 친구는 창문을 열어 외쳤다. 



"오늘 고마웠어요. 형님!"



-Fin

Copyright ⓒ SY Lee   All Rights Reserved.








 
























이전 07화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4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