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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43

2024년 2월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20여 일. 스마트폰 캘린더에 빨갛게 칠해져 있던 21의 숫자가 첫 번째 페이지에 나타나면서부터 남자의 마음도 조금씩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점에 캐나다에서 쓰던 번호 정지와 은행계좌 해지 같은 자잘한 업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런 기분이 곧바로 사그라들만했지만,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남자보다 더 요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 느낌의 불씨는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났다. 1월 말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외식과 약속에도 불편한 마음보다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더 들었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 있어 이번 여행은 끝이 좋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아 보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아침.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이벤트를 하는데 같이 갈 의향을 묻는 메시지였다. 며칠 전부터 이 도시에서 개최된 사진 페스티벌로 인해 수많은 곳에서 전시가 진행돼서 친구들과 해가 지는 시간 즈음에 같이 보러 가려했던 게 그의 원래 계획이었지만, 이번이 아니면 귀국 전에 이 중년의 친구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잔뜩 부은 얼굴을 베개로부터 억지로 떨어뜨렸다. 생각보다 거셌던 빗줄기 때문에 기록에 의한 기대감보다는 이곳에서의 '경험'에 더 조금 더 초점을 맞춘 채로 그는 항상 만나던 장소였던 스탬피드 파크 근처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안 나와서 다시는 못 보나 했는데, 결국은 다시 보게 됐구먼~"



"내가 전에도 얘기했겠지만 이곳은 워낙 좁아서 말이지. 그래서 언제 간다고? 20일이라고 했었나?"



"21일 아침 비행기니까 사실상 20일이 이곳에서의 마지막이 되겠지. 다음 주 주말에 다른 애들이랑 잠깐 밴쿠버 좀 갔다 오려고.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 애들이 좋은 가격에 호텔을 구했대. 이번에 안 가면 평생 후회 할 정도라고 하니까 뭐. 마다할 이유가 딱히 생각이 안 나더라." 




근 세 달 여 만에 만난 두 사람은 푸른색 현대 엑센트(무려 수동이었다.)를 타고 15분 여 정도 남쪽으로 달렸다. 비교적 새로 형성된 마을이었고, 이전에 그가 이곳에 있던 작은 재즈 바에 가고 싶어 닿을 방법을 알아봤지만 너무 복잡해 포기했던 그 장소였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에 도대체 이 상황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의구심이 들었던 그는 잠시 뒤 차에서 내려 친구를 따라 연못가 라고 하기에는 조금 광대했던 얼음판으로 향했다. 작은 천막과 응급차량, 그리고 누가 봐도 일부러 뚫어놓은 듯한 구멍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사람들을 보고서 단번에 이해한 남자는 얼마 안 가 속속히 물가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관중들과 같이 박수를 보냈다. 어떻게 보면 겨울 시즌에 목격할 수 있었던 가장 캘거리스러운 장면이었다. 







추위를 피해 모닥불 옆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용무를 마친 친구가 다가왔다. 흠뻑 젖은 그의 카메라가 내심 걱정되었던 탓에 본인의 극세사 천을 넘겨준 남자는 조금 더 머물면서 같이 LCD 스크린에 띄워져 있던 사진들을 구경했다. 어느 정도 수분기가 날아가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탄 둘은 점점 다운타운 중심부에 가까워져 갔다. 전시 시작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언젠가 한 번은 자그마한 보답을 하고 싶었던 남자가 친구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제안을 했고, 한 손에는 운전대, 다른 한 손에는 기어 변속 스틱을 휘적거리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 다 뭐야? 오늘 무슨 시위해?"



"오늘 LGBTQ 관련해서 모인다고 했었어. 1시간 정도 뒤에 끝날 건데 여기서도 찍을래?"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이따가 카페에서 보자." 



생각보다 많은 인파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조금 올라간 심박수와 같이 다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시청 빌딩 주변을 돌아다닌 그. 이런 광경이 전에도 종종 그의 눈에 비추어졌지만 유쾌했던 이벤트를 마주하고 난 직후에 목도한 정 반대의 분노 때문이었는지 유독 이 날 하루가 조금 다르면서도 더욱 길게 느껴지는 듯했다. 젖은 몸을 이끌고 굳이 기록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이곳에서의 1년'이라는 이야기에 마냥 좋은 모습만을 담고 싶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분위기가 점점 사그라들면서 빠져나가는 인파들과 함께 장소를 벗어난 그는 바로 근처에 있던 카페로 향했고,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결제한 뒤에 2개의 의자가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친구와 이전에는 못했던 조금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영문법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곧 업무가 끝나서 전시장으로 갈 거라는 다른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서 이제는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건넨 남자는 노곤해진 몸을 의자에서 떼어냈다. 밖으로 나서자 아까 전보다 강한 한기가 그를 반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의 캘거리라는 전제를 깔고 생각해 봤을 때 상당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확률은 조금 낮았지만 다가오는 또 다른 한 주에 다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여지가 묻은 작별인사를 그는 친구에게 전했다. 




"다음 주에도 모임이 있는 것 같던데, 그때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스케줄이 워낙 변동이 심해서 확답은 못하겠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더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을 것 같네. 1년 동안 즐거웠네 친구."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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